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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장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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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풍의 변화

각인(刻印)하는 사람을 조충소기(彫蟲小技)의 쟁이로 치부하여 천대한 결과로 인장의 문화가 침체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는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대가이고, 사대부 출신의 학자 홍석구(1621~1679)는 스스로 조각한 98과(顆)의 인장을 남겨 놓음으로써 이 시대의 각풍을 살필 수 있다. 그 후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 : 1710~1760)과 그의 숙부 회암(檜巖))이 인장을 새겼다. 추사 김정희는 청대에 유행하던 금석학의 영향을 받은 인장의 각법을 수용하였으며, 뒤를 이어 오규일(吳圭一), 정학교(鄭學敎 : 1832~1914), 유한익(劉漢翼 : 1844∼1923), 강진희(姜璡熙 : 1851∼1919), 오세창(吳世昌 : 1864∼1953), 김태석(金台錫 : 1875∼1952) 등은 근대의 전각계의 문호를 열었다.

인보의 출현

조선 말기에는 인보가 출현하게 되었다. 게다가 청으로부터 수입되는 각종의 인보들은 전각(篆刻)이라는 명칭으로 유행하였다. 우선 보인의 조성· 봉안·관리를 위해 국가에서 조성한 인보가 있다. 고종 때 보인을 대대적으로 개주·수보·개조하면서 작성한 <보인소의궤>, 보인과 부신의 관리를 위해 총목록을 작성하고 각각의 제원을 정리한 <보인부신총수>, 대한제국 선포이후 새보를 모은 <새보인본>, 장서각에서 관서인(官署印)을 정리한 <장서각소장인보>등이 있다. 그리고 사망한 왕실인사의 존호를 추상하거나 살아있는 왕실인사의 존호를 가상하면서 조성한 보인을 모은 <문조익황제상존호보문(文祖翼皇帝上尊號寶文)>·<신정왕후인보본(神貞王后印寶本)>·<현목수비옥인본(顯穆綏妃玉印本)>·<효유헌성왕대비지보(孝裕獻聖王大妃之寶)> 등이 있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에 의하면 보인의 주조에 있어서 참여한 인원은 이조판서와 호조판서를 비롯하여 행정관이 29명, 기술자만 들어도 23종의 기술자가 77인이 참여하여 조성된다. 전자관(篆字官)이나 각수(刻手)를 제외한 기술자들의 종목을 살펴보면 화사(畵師)·보장(寶匠)·두석장(豆錫匠)·금장(金匠)· 은장(銀匠)·옥각수(玉刻手)·소로장(小爐匠)·담편장(擔鞭匠)· 병풍장(屛風匠)·목수(木手)·소목장(小木匠)·조각장(彫刻匠)· 야장(冶匠)·쇄자장(鎖子匠)·마조장(磨造匠)·마광장(磨光匠)· 칠장(漆匠)·호갑장(護匣匠)·척피장(皮匠)·다회당(多繪匠)·입사장(入絲匠)· 안자장(鞍子匠)·매집장(每緝匠) 등이 망라되는 민관 합동 종합예술의 결정이다. 교서관에는 각수(刻手)전자관(篆字官)이 있어서, 전자관은 보문(寶文)을 쓰고 각수는 보문을 새겼다.

사인의 인영

사인의 인영을 찍은 인보로는 헌종과 왕실소장인을 모은 <보소당인존>, 고종이 사용하던 인장을 모아 만든 인보로 <덕수궁인존> · <수옥헌인존>, 순종의 왕세자, 황태자시절의 용인을 찍은 <동장(銅章)>, 영친왕 이은의 용인을 모은 <은친왕인존> 등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왕실의 인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일반인들의 사인을 모은 인보로는 <전황당인보> · <근역인수> 등이 대표적인 인보이다. 개인의 인보로는 <김정희인보> · <김태석인보> · <오세창인보> 등이 있다.

김정희인, 인면, 인보(보소당인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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