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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장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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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장의 관리

관인의 관리는 고려시대에는 인부랑(印符郞)에서, 조선은 상서원(尙瑞院)에서 관리하였다. 새보(璽寶)를 맡은 관원인 장새관(掌璽官)새보(璽寶), 부패(符牌), 절월(節鉞) 등을 관리하였다.
어보는 종묘의 사직을 이어간다는 상징적인 보인으로 사후에 존호, 시호, 휘호 등을 새겨 종묘에 보관하며 의례용으로 임금의 가례나 보위에 오르는 공식적으로 종묘에 고해야하는 등 행사의 의식에 사용하였다. 옥으로 만든 옥보(玉寶)와 유기로 만들어 금도금한 금보(金寶)가 있다. 현재 330여과의 어보가 전한다.
옥새는 보통(寶筒)에 넣어 보갑(寶匣)에 보관한다. 인장은 인갑(印匣)에 넣어 인뒤옹(인궤)에 용도와 종류별로 보관한다. 그리고 인뒤옹은 인가(印家)에 보관하고, 인가는 인신관(印信官)이 직접 관리한다. 특히 각종의 부정부패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전곡출납의 경우 봉사인(奉使印)을 사용하여 전곡을 출납하였다. 전곡의 출납 후에 봉사인은 환수하여 호조에서 직접관리 하였다. 관인을 위조하는 경우 위조관율(僞造關律)에 의하여 인신을 위조한 율(律)로 극형으로 엄벌하였다.

관인, 인면, 상서원인, 인면
인장 주조

관인의 주조는 대개 이, 호, 예, 병, 형, 공 등의 각 부처에서 임금에 아뢰어, 상서원에서 어보의궤율(御寶儀軌律)이나 전례에 따라 주조하였다. 어보를 전각할 때는 존호, 휘호, 시호 등의 순서로 새긴다. 어보의 인재(印材)는 남양옥(南陽玉)을 사용하였고, 왕비와 왕세자의 보인도 같이 주조하였다. 태종, 세종 때 각 부서의 인장을 부분적으로 주조하였으며, 임진왜란 직후 선조 때 각 관아의 인장들을 다시 주조하였다. 영조(英祖) 때 다시 문란해진 보식(寶式)을 정제하였고, 고종 2년(1865) 대왕 대비전과 대비전의 옥책문제술관 등의 관리를 임명하여 면모를 갖추었다. 고종 13년(1876) 11과의 보인을 개주, 개조·수보하였고,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를 만들어 전모를 기록하였다.

사인의 유래

사인의 사용은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으나 고려 말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관인(官印) 뿐 만 아니라 관리의 부인들도 사인을 사용하였는데, 특히 각종 매매문서라든가 분재기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낙관의 유행에 따라 문인묵객들에 의하여 서화에 사용된 낙관인이 주종을 이룬다.
  인재와 형태에 있어서 조선 시대의 사인은 전대보다 널리 일반화되어 그 재료도 돌·상아·청동·나무·옥 등 다양할 뿐 아니라, 인장의 형태도 사각형·직사각형·원형을 비롯하여 종모양·솥모양·호리병모양·향로모양·매화 등 여러 가지 다각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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