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용된 검색어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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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정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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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서울 숭례문 (서울 崇禮門)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Ο 숭례문 방화 화재(2008.2.10)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崇禮門放火事件)은 2008년 2월 10일 ~ 2월 11일 숭례문 건물이 방화로 타 무너진 사건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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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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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서울 창의문 (서울 彰義門) ...숭례문이나 흥인지문과 같은 장대석으로 축조하고 내부의 등성시설을 설치하였는데, 북쪽의 등성시설은 ‘ㄷ'자형의 일반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쪽은 낮아지는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고, 여장은 총안이 없는 전돌로 축조되어 있다. 가구 방식은 평주의 주두 위에 바로 대들보를 얹고 이 위에 다시 화반형 부재를 놓아 마룻보와 중도리의 짜임을 받쳤다. 마룻보 위에는 사다리꼴에 가까운 파련대공을 놓아 뜬창방·장여·도리로 짜여 진 마룻도리를 받고 있다. 천장은 서까래를 모두 노출시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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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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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평창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平昌 五臺山 中臺 寂滅寶宮) ...부 건물 모두 동일하게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외부는 익공식, 내부는 다포식 건축양식이다. 외부 건물은 조선 후기(19세기)의 보편적인 이익공양식 구조를 보이지만, 내부 건물은 기둥의 편수깍기, 창방뺄목의 형태, 살미와 첨차의 공안, 모각소로의 표현, 앙서 상면의 곡선처리 등 부재의 치목수법과 구성형식이 조선 초·중기의 건축물인 심원사 보광전(북한 소재, 1374년), 국보 안동 봉정사 대웅전(1435년 중창), 국보 서울 숭례문(1448년 중수) 등과 유사한 고식기법을 가지고 있어 건축·양식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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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군
국가유산 안내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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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서울 흥인지문 - 개별 1 (서울 興仁之門) ...숭례문과 더불어 가장 규모가 큰 성문이다. 성벽과 이어진 축대에 아치형의 통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워 성문을 만들었다. 서울의 성문 가운데 문루를 2층으로 만든 것은 숭례문과 흥인지문밖에 없다. 문루는 문을 지키는 장수가 머무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했다. 문루 바깥으로는 벽돌로 된 담장과 나무판으로 된 창문을 설치해서 적을 막는 데 유리하게 하였다. 흥인지문의 문루는 전체 구조는 간단하지만 장식이 많은 19세기 건축물의 특징을 잘 반영한다. 또 흥인지문의 앞에 적을 막기 위한 반달 모양의 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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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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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수원 화성 - 개별 21 (水原 華城) ...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홍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 옹성: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 용마루: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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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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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서울 청계천 유적(광통교지,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 - 개별 1 (서울 淸溪川 遺蹟(廣通橋地,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라 불렸다. 조선 초인 1411년(태종 11), 1422년(세종 4)에 개천 공사를 추진했고, 1760년(영조 36)에는 대규모 준설공사를 실시하고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광통교는 도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길목이었으므로 어떤 다리보다 통행량이 많았다. 수표교는 수표를 곁에 세워 수위를 측량했다. 두 다리 교각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마름모 형태로 다듬은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잘 보여준다. 오간수문은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된 성 밑에다 청계천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뚫은 수구(水口)로서 홍예(虹蜺) 5칸을 튼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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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국가유산 채널(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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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문화유산-7분다큐 숭례문 3부 다시 숭례문 앞에 서다 ...숭례문을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 1909일, 2013년 5월 4일, 우리 앞에 숭례문이 다시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해진 숭례문. 과연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오늘, 우리 앞에 선 숭례문을 만나본다. <서울 숭례문 방문 정보> 위치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연락처 : 숭례문 관리소 02-779-8547 주변 볼거리 :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관련 홈페이지 :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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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문화유산-7분다큐 숭례문 2부 숭례문 치열했던 5년의 기록 ...숭례문이 온 국민의 염원을 모아져 그 터, 그 자리에 숭례문을 다시 세우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오늘의 것으로 숭례문을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옛것을 살려 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토록 한 것이다. 따라서 복원작업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 장비 하나에도 역사성과 전통을 따랐다. 600년의 시간을 하나하나 제자리에 옮겨놓는 작업! 치열했던 5년간의 복원작업, 그 현장을 만난다. <서울 숭례문 방문 정보> 위치 : 서울 중구 세종대로 40 (남대문로4가) 연락처 : 숭례문 관리소 02-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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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문화유산-7분다큐 숭례문 1부 한국인이 사랑한 큰 門, 숭례문 ...숭례문이었다. 숭례문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임금이 사는 궁궐과 종로로 이어지는 요충에 자리했다. 조선의 심장부와 바로 연결되는 나라의 정문. 이름 또한 조선이 추구하는 진리인 ‘예“를 받든다는 뜻을 담았다. 숭례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라의 주권을 다시 찾은 환희의 순간에도, 한 민족이 이념으로 갈라서 버린 탄식의 순간에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역사적인 순간에도, 숭례문은 항상 그 자리, 우리 곁에 있었다. 600년 굴곡진 세월을 묵묵히 견뎌온 숭례문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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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지식이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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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발굴조사 보고서 『숭례문 발굴조사 보고서』(2008~2010년 발굴조사지역)는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복원을 위해 숭례문 석축, 성벽, 주변 도로와 여기에서 출토된 601점의 유물을 수록했다. 주요내용으로는 숭례문 축조 당시의 지표면과 변화과정, 석축 및 성벽의 본래 위치와 축조 방법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 발행년도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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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현판 보존처리 - 발행년도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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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숭례문화재피해현황및수습보고서] - 발행년도
- 2008
간행물(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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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 : 숭례문 현판 보존처리 - 발행년도
-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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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030775_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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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 - 발행년도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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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026420_0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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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숭례문 복구현황 - 발행년도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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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7.pdf
무형유산 지식새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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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기록화-기록영상 서울 숭례문 전면(남측)_대목장 국가유산청에서는 무형유산의 환경변화에 대응하고 체계적인 기록보존을 위해 1995년부터 국가무형유산 기록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기록화 사업은 보유자(단체)의 기예능을 영상과 사진으로 상세히 기록하고 이를 기반으로 기록도서 발간을 추진한다. 대목장은 목조건축을 짓는 장인으로, 1982년에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2년에 고택영, 전흥수, 신응수, 최기영 보유자의 제작 실연 및 인터뷰를 바탕으로 기록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물인 기록영상과 기록도서에는 건축의 역사, 재료, 제작공정, 전승현황 등이 담겨 있다.
- 발행년도
- 199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