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수오멘린나 요새 / Fortress of Suomenlinna
- 국가명
- 핀란드
- 등재연도
- 1991
- 등재기준
-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위치
- 남핀란드 주(Province of Southern Finland) 우시마 현(Region of Uusimaa) 헬싱키 항(Helsinki Harbour)
- 좌표
- N60 8 49.992 E24 59 13.992
- 간략개요
- 수오멘린나 요새는 헬싱키 항구 입구에 있는 군도(群島)의 섬들을 연결하여 건설한 요새이다. 18세기 후반 스웨덴이 건설한 이 요새는 당시 유럽의 군사 건축의 특징을 보여 주는 매우 흥미로운 유적이다. 수오멘린나는 독특한 역사적 기념물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해상 요새들 중 하나이다. 요새의 역사는 핀란드와 발트 해 지역의 역사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헬싱키는 수오멘린나 요새 덕분에 초기의 성장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 정당성/가치
- 1747년 핀란드가 스웨덴 왕국의 영토였을 당시에, 스웨덴 스톡홀름 의회는 동쪽 국경을 요새화하고, 헬싱키 외곽의 군도를 핀란드 주둔군의 군사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헬싱키 근처의 군도 스베아보리(Sveaborg)가 요새의 부지로 선정되었고, 1748년에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다. 스웨덴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스가 초기 건설 자금의 대부분을 제공했다. 수오멘린나 요새 건설 사업은 18세기 스웨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설 계획이었다. 사업 목적은 몇 개의 섬을 연결하여 요새를 만들고 선박이 항구로 출입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새 건설 작업은 스웨덴 제독 오귀스탱 에렌스베르트(Augustin Ehrensvard, 1710~1772) 중령의 감독 하에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스웨덴 최고의 공학자와 기계 전문가들이 가세하여 이루어졌다. 스웨덴과 핀란드 전역에서 온 정규군이 건설 요원으로 참가했다. 건설 작업이 한창일 때는 건설 인력이 6,500명을 넘었다. 에렌스베르트는 당시 30대 중반의 귀족 출신 포병장교였다. 그는 헬싱키의 매우 특수한 지리적 특징에다 보방(Vauban)의 군사 요새 이론을 적용시켰다. 보방은 당대를 대표하는 요새 축성 기술의 명수였다. 에렌스베르트는 2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는 헬싱키 인근의 군도를 연결하는 요새 망을 건설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도시 주위의 몇몇 전략적 지점을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지만, 1772년 사망하기까지 에렌스베르트는 스베아보리(스웨덴의 요새)라 불리는 집단적인 요새 망을 완성하여 선박이 헬싱키로 드나드는 것을 통제할 수 있었다. 사실상 요새를 사용할 준비가 완료되었으며, 전체 계획은 1774년에 수정되었다. 건설 작업은 18세기 말에 사실상 완료되었다. 요새를 건설한 목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야망에 맞서 스웨덴을 지키는 것이었다. 핀란드 만에 있는 러시아의 주요 군사기지는 크론슈타트였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발트 해 동부 유역에서 스웨덴 해군력에 도전하기 위한 신식 러시아 해군의 모항(母港)으로 지정했다. 에렌스베르트가 사망한 뒤에도 요새화 작업은 계속되었다. 국왕 구스타프 3세(Gustav ⅲ, 1771~1792)는 이 작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요새의 명성은 높았으나 스웨덴의 힘이 점차 감소했고, 수오멘린나 요새의 운명은 유럽의 정치판도에 의해 바뀌었다. 1808년~1809년의 전쟁에서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 사이에 조약이 맺어졌으며, 그 결과 러시아가 이곳을 점령했다. 요새는 러시아에 점령당했고, 이후 110년 동안 러시아의 요새가 되었다. 러시아 점령 이후 요새는 다시 강화되었고, 요새의 이름은 ‘비아포리(Viapori)’로 바뀌었다. 19세기 말 요새에는 대략 4,000명의 러시아군이 있었다. 크림 전쟁 중인 1855년, 프랑스와 영국군이 요새에 포격을 가했지만 요새는 무너지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웨덴이 공사했던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이후 보수 재건 작업과 새로운 건설 작업이 진행되었다. 몇 개의 손상된 건물을 해체하거나 더 낮게 만들었으며, 흙으로 둑을 쌓아 새로운 해안 방어선을 구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오멘린나 요새는 방어 계획의 일환으로 주로 창고로 사용되었다. ‘표트르 대제의 해상 요새’ 계획의 목표는 탈린(Tallinn, 에스토니아)과 함께 전체 핀란드 만을 차단하여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핀란드가 1917년에 독립한 이후 수오멘린나 요새는 핀란드 요새가 되었다. 1918년부터 이 요새는 핀란드어인 ‘수오멘린나(‘핀란드의 요새’라는 뜻)’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성벽 6㎞와 190채의 건물이 보존되었다. 1918년~1919년의 내전 이후 요새는 포로수용소가 되었다. 수오멘린나 요새가 마지막으로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헬싱키의 공중감시 기지로 사용되었을 때이다. 1972년까지 요새의 성격을 띠기는 했지만, 1963년부터는 주로 관광지와 휴양지로 이용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