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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산명)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1940~1945)
국가명
폴란드
등재연도
1979
등재기준
(vi)
분류
문화
유산면적
위치
리틀 폴란드(마워폴스카) 주(Lesser Poland (Małopolska).Voivodship, 옛 비엘스코비아와, Bielsko-Biała) 오시비엥침 시(O?wi?cim County)
좌표
N50 4 0 E19 21 0
간략개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이다. 수용소의 요새화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인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정당성/가치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했던 잔혹함을 상징한다. 수백만의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이 저항하고 희생당했던 이곳은 일반적 의미의 역사 박물관이 아니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최악의 범죄 행위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1947년 박물관을 설립할 당시의 상태가 그대로 보존되어 온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의 수용소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나치가 집단 학살을 자행했던 상황들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이 수용소는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24개국의 다른 나라에서 온 4,000,000명의 사람들(수많은 유대인을 포함)이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 살인을 당했다. 나치스 친위대가 사용한 방식들과 그 효율성은 문서, 사진, 기타 증거물로 알 수 있다. 강제 수용소는 나치가 1940년에 오시비엥침 시의 교외에 세웠다. 그곳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점령하고 있었다. 오시비엥침 시는 나중에 독일어인 ‘아우슈비츠’로 바뀌었고 이것이 수용소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수용소는 더 넓어져 3개의 주요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구역은 ‘주(主) 수용소’라고 불렀으며, 후에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로 알려졌다. 주 수용소는 전쟁 전에 폴란드의 군대 막사로 쓰던 건물과 토지에 만들어졌으며, 수용 인원은 20,000명을 넘기도 했지만, 보통 15,000명 전후였다. 두 번째 구역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 알려진 비르케나우 수용소이다. 이곳에 1944년 당시 유대인, 폴란드 인, 집시, 기타 국적자로 이루어진 90,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수용되었다. 아우슈비츠 전체에서 가장 큰 구역으로, 막사는 대개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었다. 나치는 1941년 오시비엥침에서 3㎞ 떨어진 브제진카(Brzezinka) 마을의 주민들을 퇴거시킨 뒤 그 가옥들을 압수하여 철거하고 이 수용소를 짓기 시작했다. 대량 학살 장비들 대부분이 비르케나우에 설치되었고, 희생자의 대다수가 이곳에서 숨졌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곳곳에는 지금도 인체를 소각하고 남은 재로 가득하며, 아우슈비츠 유적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수용소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말살이었다. 광막한 공간, 죄수용 막사, 건물들의 폐허와 잔해, 길게 이어지는 담장과 도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극도의 비열함, 잔인함, 죄악을 생생히 느끼게 해 준다. 아우슈비츠의 세 번째 구역은 부나(Buna) 보조 수용소로, 1943년 11월에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가 되어 다른 보조 수용소들을 관할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에는 보조 수용소가 40개 이상 있었다. 처음에는 아우슈비츠에 폴란드 인들만 갇혀 숨졌지만, 후에는 구 소련 전쟁 포로와 집시 및 다른 국적의 사람들도 이곳에 감금되었고, 1942년부터는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획의 일환으로서 유럽 지역 유대인들에게 자행되었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학살이 벌어지게 되었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의 과반수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나치 친위대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가스실, 소각장, 다른 건물들을 허물어 없애고 문서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다. 행군이 가능한 죄수들은 독일로 후송되었다. 수용소에 남겨진 이들은 1945년 1월 27일 구 소련의 적군(赤軍)에 의해 풀려났다.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법을 통해, 남아 있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의 지대 위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독일 나치는 유럽에 있는 유대인 대량 말살 정책인 ‘최종 해결책’(Final Solution)을 실행하기 위해 6개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를 건설했는데, 그 중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가장 중요하고도 악명 높은 곳이었다. 처음에는 폴란드인 수용소로 폴란드에 지어졌으나, 이후 소련의 전쟁 포로 수용소로 사용되다가 곧 여러 국적 출신의 죄수들을 수용하는 감옥이 되었다. 1942년과 1944년 사이에 아우슈비츠는 소위 말하는 인종주의의 기원을 이유로 유대인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던 주요 대량 학살 수용소였다. 100만 명이 넘는 남녀노소 유대인들과 수만 명의 폴란드인들의 대량 학살 외에, 수천 명의 로마와 신티 등의 집시들과 여러 유럽 국가들의 포로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 나치의 유대인 약탈, 탄압, 학살 정책은 제3제국이 퍼뜨린 인종차별적이고 반유대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나왔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강제 수용소들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으며, 학살과 강제 노역을 겸하는 곳이기도 했다. 인간 착취와 고통을 보여주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 그리고 주변의 보호 구역은 열등하다고 여긴 집단들의 인간 존엄성을 부정하고 나아가 계획적으로 학살한 비인간적이고 잔혹하며 조직적인 만행의 증거로서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올랐다. 이 수용소는 90%가 유대인이었던 120만여 명의 사람들을 소각로에서 사라지게 만든 반유대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나치 정책의 살인적인 성격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철벽, 가시철망, 철도 대피선, 승강장, 군영, 교수대, 가스실과 소각로는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대학살뿐만 아니라 독일 나치의 대량 학살과 강제 노역 정책이 어떠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곳에는 계획적으로 살해된 사람들의 흔적들이 남아있으며, 이를 자행한 조직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특히 그 중 개인 소지품들은 이 집단 학살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에 피해자들이 살았던 삶, 그리고 그들의 소유물과 유해에 가해진 유린을 입증한다. 이 수용소와 주변 지역은 복원 작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본래의 증거들이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진정성과 보전성을 지니고 있다. 기준 (vi): 주요 사건, 살아있는 전통, 사상, 신념, 그리고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예술적?문학적 작품과 직접적으로 혹은 유형으로 연관이 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는 나치 정권이 의도적으로 자행했던 유대인들의 대량 학살, 그리고 수많은 다른 이들의 죽음의 유적이며, 인간에게 저지른 가장 큰 범죄들 중의 하나라는 명백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수용소는 무시무시한 고난 속에서도 자유와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하고 인종 전체를 쓸어버린 독일 나치의 만행에 저항했던 인간 영혼의 힘을 보여주는 기념물이다. 이곳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 차별 정책과 야만주의에 대한 전인류의 기억의 장소이다. 인간성의 역사 중 가장 어두운 장에 대한 집단적 기억의 장소이자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장소이며,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와 인간 존엄성에 대한 부정이 낳을 수 있는 수많은 위협과 비극적 결과들을 경고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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