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본문
제목(유산명)
토룬 중세 마을 / Medieval Town of Toru?
국가명
폴란드
등재연도
1997
등재기준
(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48ha
위치
쿠야브스코포모르스키에 주(Kuyavian-Pomeranian Voivodship) 토룬 시(City and county of Toru?)
좌표
N53 0 36 E18 37 9.984
간략개요
토룬은 13세기 중엽에 독일 기사단(Teutonic Order)이 프로이센을 정복하고 복음을 전도하기 위한 근거지로 이용하기 위해 성채를 쌓으면서 형성된 도시이며, 이후 한자 동맹(Hanseatic League)에 가입하여 무역 도시로서 기능했다. 옛 시가지와 신시가지에는 14세기, 15세기에 지은 건축물이 즐비하다. 이 중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생가도 있다. 이들 인상 깊은 건축물들은 토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정당성/가치
건설 당시의 도로 형태와 뛰어난 옛 건축물을 거의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토룬은 중세 시대 생활양식을 완벽하게 보여 주는 유서 깊은 소규모 무역 도시이다. 토룬의 건물들은 중세에 벽돌로 지은 당대 최고의 건축물로서, 일부 건물은 특정 건축 양식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나의 성채를 두고 두 도시가 결합하는 것은 중세의 정착지가 통합되는 드문 형태로서 이 지역 도시 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토룬은 인간의 창조력이 낳은 탁월한 걸작으로서, 그 독특한 공간 배치는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중세 유럽의 도시 발달사에 귀중한 1차 자료가 되고 있다. 유럽 예술의 중심지를 비롯하여 특히 브루게(Brugge), 겐트(Ghent) 같은 북유럽의 대규모 무역 도시와도 문화를 교류하였던 이곳에서는 특히 한자 동맹에 소속된 도시들 간에 예술적 경험을 나누고 창조적으로 변용하였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중세 시대에 ‘헤움노의 땅(Chełmno land, 라틴어 Terra Culmensis)’으로 알려진 지역에 있는 토룬은 1233년에 도시 인가를 받았다. 중세 초기에 강과 맞닿은 남동쪽에 요새를 세웠으나, 13세기 중엽 독일 기사단이 요새를 재건축하였다. 토룬의 원래 기능은 프로이센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근거지였다. 그러나 곧 구 시가지는 발트 해와 동유럽 사이를 오가며 교역하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프스코프(Pskov), 노브고로트(Novgorod), 블라디미르(Vladimir) 같은 도시들이 발트 해로 흘러드는 비스와(Vistula, Wisła) 강을 따라 연결되어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역 도시로서의 기능은 점차 확대되었다. 토룬은 독일 기사단이 다스리던 지역에서 한자 동맹의 주축을 이루는 도시가 되었다. 1264년부터 성채 북쪽과 구 시가지 동쪽에 형성된 신시가지는 수공예과 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토룬은 유럽의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중심지, 특히 건축 중심지였다. 이 도시에는 독일 기사단이 다스리던 지역과 주변 국가들에 큰 영향을 미친 건축의 걸작들이 즐비하며,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가 1473년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17세기에 스웨덴과 치른 전쟁으로 위기를 맞으면서, 이 도시의 번영도 저물어 갔다. 옛 시가지는 중앙에 있는 시장을 중심으로 거주지 서쪽에 형성되었다. 남쪽과 강 위쪽으로 가지런히 뻗어 있는 도로는 강 아래쪽으로 나란히 뻗어 있는 5개의 도로와 십자 모양으로 교차한다. 북쪽에도 도로가 열십자로 뻗어 있지만 배치가 남쪽보다 덜 정연하다. 시장 광장의 중심 건축물은 1391년~1399년에 세운 구 시청사로서 인상 깊다. 1274년에 세운 탑을 비롯하여 건물 일부는 예전부터 사용해 오던 것이다. 1602년~1605년에는 건물의 고딕 양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층이 하나 증축되었다. 성요한 성당(1992년에 토룬 대성당으로 바뀌었다)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건축되었다. 예전에 ‘그레이 프라이어스(Grey Friars, 제2프란치스코회)’의 교회였던 성모 승천 교회에는 바로크 시대 가구와 14세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다. 점점 요새화되어 가던 구 시청사는 1250년~1300년에 망루를 보강한 이중벽을 갖추었다. 이 요새 시설은 1420년~1449년에 재건축하였으나, 19세기에 일부가 해체되었다. 그러나 강과 맞닿은 남쪽 구역 대부분은 성문, 탑과 함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다. 신시가지에 있는 성야고보 교회는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또 하나의 멋진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에는 바로크 시대 가구들이 많이 있다. ‘블랙프라이어스(Blackfriars, 도미니크회)’의 성니콜라스 교회는 19세기에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그러나 교회 유적과 회랑이 발굴된 후에 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 독일 기사단 시절에 세운 성채 대부분은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가 벌인 13년 전쟁(1454~1466) 때 파괴되었다. 유적은 발굴된 후에 박물관 형태로 사람들에게 개방하였다. 구 시가지와 신시가지 모두 중세 시대 벽돌로 지은 훌륭한 중산층 가옥이 많으며, 상당수 가옥이 건축 당시 고딕 양식의 외관과 옥내 시설인 격벽, 천장, 채색 장식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많은 가옥들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중세 시대 도시 배치도 원래의 벽돌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자주찾는 메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