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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유산명)
알코바사 수도원 / Monastery of Alcobaca
국가명
포르투갈
등재연도
1989
등재기준
(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위치
레이리아(Leiria) 주, 알코바사(Alcobaca)
좌표
N39 32 60 W8 58 36.012
간략개요
리스본 북쪽에 있는 알코바사(Alcobaca) 수도원은 12세기에 알폰수 1세(Alfonso Ⅰ)가 건설하였으며, 산타마리아 달코바사(Santa Maria d’Alcobaca) 수도원이라고도 한다. 이 수도원은 시토회(Cistercian) 건축물로, 그 크기와 단아한 건축 양식, 아름다운 건축 재료, 섬세한 건축 등이 어우러진 고딕 양식의 걸작이다.
정당성/가치
산타마리아 달코바사 수도원은 시토회의 종교 건축물이며, 그 장대한 규모와 함께 간결한 건축 양식, 멋들어진 건축 재료, 섬세한 건축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고딕건축의 걸작이다. 이곳은 성 베르나르드(St Bernard) 시대에 부르고뉴(Burgundy)에서 발전한 미학적 기법이 전파된 것을 보여 준다. 또 퐁트네(Fontenay)의 시토회 초기 건축물에서 드러난 금욕주의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 동 페드루(Dom Pedro, 페드루 1세)와 그의 연인 이네스 드 카스트루(Dona Ines de Castro)의 석관이 가장 아름다운 고딕양식의 장례조각상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이 수도원은 수력발전과 같은 독특한 기반시설을 겸비한 시토회 건축물의 대표적인 전형이다. 그리고 기능적으로 편리한 건물이다. 중세의 수도원 건물(회랑과 세면실, 예배당, 객실, 기숙사, 수도사들의 방과 식당)에 18세기형 부엌을 덧붙인 것이 유명하다. 이 수도원이 설립된 것은 포르투갈 군주제의 시작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폰수 엔히케스(Afonso Henriques)가 1139년 아폰수 1세로 등극했을 당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십자군(Crusaders)과 종교에 두었다. 십자군은 1147년 리스본에서 시작되었다. 아폰수 1세는 산타렝(Santarem)에서 거둔 승리(1152년)를 인정받기 위해 알코바사를 시토회에 바쳤다. 그리고 시토회가 주변 영토를 개간하고 식민지화할 것이라고 믿었다. 클레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드(St. Bernard)가 세상을 떠난 1153년 당시 시토 수도회는 잘 운영되고 있었다. 알코바사는 성 베르나르드의 생애에서 마지막 ‘개척지’였다. 12세기 말, 알만수르(Al-Mansoor)가 이끄는 이슬람 군사의 공격을 받았지만 포르투갈 왕실의 기반은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3세기에는 퐁트네 수도원과 비슷한 수도원 성당과 아름다운 수도원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수도원의 정치적, 지적 영향력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전역에 널리 퍼졌다. 알코바사는 종교적 신앙(가장 중요한 왕립수도원 학교가 이곳에 있었다)과 학문 연구의 중심지였고,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의 대수도원장은 강력한 종교적 권력을 손에 넣었다. 비옥한 토지, 마을 13곳, 항구도시 네 곳, 성 두 채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앙 1세(Joao Ⅰ)부터 주앙 4세(Joao Ⅳ)의 재위 기간에는 수도원장을 왕이 직접 임명하였다. 수도원장은 평의회의 위원이 되었고, 그랜드알모너(Grand Almoner, 중세 수도원에서 자선을 베푼 성직자)와 국왕을 보좌하는 임무도 맡았다. 왕실의 특별영역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왕자 동 아폰수의 성구실은 마누엘 양식이며, 1505년에 알쿠바사의 수도원장 이름을 따왔다. 벨렝의 이에로니미테스(Hieronymites) 수도원을 세운 건축가 중 한 사람인 주앙 두 카스티요(Joao do Castilho)가 2층 회랑을 건축하였다. 카스티요는 수사 주앙 투리아노(Joao Turriano)의 바로크 양식의 숙소(1702) 일부와 정면 파사드(facade), 그리고 왕의 방도 지었다. 이 특권층과 포르투갈의 군주제의 관계를 나타내는 최후의 상징은 유명한 동 페드루(페드루 1세)와 연인 이네스(Dona Ines de Castro)의 석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드루 1세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뒤 쌍둥이 석관을 주문하였다. 이 사건은 카모엥시(Camoens)와 벨레스 데 게바라(Velez de Guevara)와 같은 여러 동시대 작가와 영화 제작자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곳에는 살해당한 왕비와 이를 복수한 왕이 나란히 묻혀 있다. 무덤은 높은 석관을 거인들이 받치고 있고 이를 천사들이 감시하는 모습으로 설계되었다. 이는 14세기에 흔히 사용된 기법으로, 석관은 이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1810년~1811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훼손시킨 일부분만 복구한 상태지만 조각 장식의 기법은 인간의 운명, 죽음 그리고 기독교적 영생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는 강렬한 상징주의를 능가하고 있다. 1360년 무렵에 완성된 석관은 페드루 1세가 이네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 확실한 증거이다. 이네스는 포르투갈 중서부의 도시 코임브라(Coimbra)에서 페드루 1세의 아버지 아폰수 4세(Afonso Ⅳ)의 지시로 암살당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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