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두브로브니크 옛 시가지 / Old City of Dubrovnik
- 국가명
- 크로아티아
- 등재연도
- 1979
- 등재기준
- (i) (iii)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97㏊
- 위치
- 아드리아 해(Adriatic Coast)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Dubrovnik-Neretva) 주
- 좌표
- N42 39 2.016 E18 5 29.004
- 간략개요
- 달마티안(Dalmatian) 해변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진주(Pearl of the Adriatic)’는 13세기 이후 지중해의 요충지였다. 두브로브니크(Dubrovnik)는 1667년의 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교회, 수도원, 궁전과 분수가 보존되어 있다. 1990년대에 무력 분쟁 때문에 또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유네스코의 중요 복원 프로그램으로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 정당성/가치
- 두브로브니크는 7세기 전반에 에피다우름(Epidaurum) 피난민들이 섬에 정착해 ‘라우스(Laus)’라고 명명하면서 건설되었다. 15세기까지 불리던 이름 라구사(Ragusa, Rausa)는 라틴어로 암석을 의미하는 ‘Lausa’에서 왔다. 그 반대쪽의 스르지(Srđ) 산 아래에는 크로아티아어로 떡갈나무를 뜻하는 ‘두브라야(dubrava)’에서 기원한 ‘두브로브니크’라는 정착지가 있다. 이 정착지는 슬라브족이 일구었는데, 12세기경 섬과 해안 간의 해협이 메워지면서 정착지가 통합되었고 이때부터 비잔틴 제국의 보호를 받았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 베니스의 통치(1205~1358) 아래 있었으며, 1358년에 자다르(Zadar) 평화협정에 따라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으로 합병되었다가 15,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실질적인 공화제 자유국가였다. 그 후 지중해 해운업의 위기와 공공건물을 대부분 붕괴시킨 1667년 4월의 지진 참사 때문에 공화국의 행복은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이 엄청난 지진은 도시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두브로브니크는 균형 잡힌 거리 배치를 지닌 중세 후기의 성곽도시로, 놀랄 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웅장한 요새와 기념비적인 성문에 있는 뛰어난 중세 양식,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중에는 1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청(지금의 렉터스(Rector's) 궁)이 있으며, 14세기에 지어졌으나 외관은 거의 바로크 양식인 프란체스코 수도원, 1667년의 지진 이후 재건축된 대규모의 도미니크 수도원 대성당,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예술가의 손을 거친 작품임을 증명하며 절충적인 외관을 지닌 관세청(Sponza), 그리고 도시의 수호성인 성 블라이세(Blaise) 성당 같은 바로크 양식 교회 등이 있다. 원래 세계유산은 방어벽과 도시 내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15세기에 계획, 개발한 필레(Pile)의 중세 교외 공업단지와 11세기 초부터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15, 16세기 형태를 지닌 절벽의 로브리예나츠(Lovrijenac) 요새를 포함시켰다. 여기에 17세기 초에 지어져 외국에서 들어오는 전염병 보균자들을 수용했던 검역소와 남동 돌풍으로부터 항구를 보호하려고 15세기 말에 조성한 방파제, 북쪽에 있는 해자를 통제하려고 1449년에 지은 레벨린(Revelin) 요새도 추가했다. 로쿠룸(Lokrum) 섬은 해변에서 500m 떨어진 두브로브니크 남동쪽에 있다. 이 섬은 1023년에 베네딕트회 수도원이 되었는데, 이는 두브로브니크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후 몇 세기 동안 계속 확장되었으며, 15세기 후반에 파도바(Padua)에 있는 성 유스티나회 신도들에게 넘어가면서 베네딕트회의 잔해가 있던 남쪽에 고딕-르네상스 양식으로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19세기 초의 점령 기간에 프랑스인이 왕립 요새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해 1830년에 오스트리아인이 완공했다. 1859년에는 훗날 멕시코의 황제가 된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Maximilian) 대공이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폐허가 있던 곳에 고전주의 양식의 저택을 지으려고 이 섬을 샀는데, 공사는 일부만 완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