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본문
제목(유산명)
레보차, 스피슈 성과 그 주변 기념물 / Levo?a, Spi?sky Hrad and the Associated Cultural Monuments
국가명
슬로바키아
등재연도
1993
등재기준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1,351㏊
위치
좌표
N48 59 58 E20 46 3
간략개요
스피슈 성(Spi?sky Hrad)에는 13세기~14세기 동유럽의 군사·정치·종교 건축물이 모여 있으며, 당시 로마네스크와 고딕 건축 양식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레보차(Levo?a)는 유서 깊은 중세 도시로, 13세기~14세기에 요새 안에 만들었으며, 유적지가 확장될 때에 포함되었다. 유적 대부분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14세기에 건축된 성 야곱(St James) 교회에는 15세기와 16세기에 만든 고딕 양식의 제단이 10개나 있다. 1510년경에 거장 파울(Master Paul)이 완성했다는 높이 18.6m에 이르는 그림도 있다.
정당성/가치
이 유적지는 독특한 도시 건축물과 자연 경관이 높은 예술성과 미학적 가치를 이루며 하나로 모여 있다. 성은 문화·사회·예술의 발달을 보여 주는 특징적인 복합물로,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군사·정치·종교·사회적 요소들이 주변 경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스피슈 성 스피슈 성은 서부 슬로바키아의 평원에 솟은 언덕에 있다. 이 유적지에는 일찌감치 신석기시대(기원전 5000)부터 사람이 거주하여 청동기시대까지 이어졌다. 1세기에는 요새 정착촌이 세워져 당시 푸초프(Puchov) 사람들의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모라비아(Moravian) 왕조 시대(9세기)에도 요새로 쓰였다. 이 성은 12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나 원래의 건축물은 지질학적 단층 위에 건설되어 무너졌다. 오늘날 남은 성은 13세기 전반에 동쪽의 타타르족 침입에 대비하여 건설한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궁전은 1249년에, 아성은 1270년에 완성했다. 동부 유럽에서 가장 큰 성으로,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 중유럽과 동유럽의 성보다도 프랑스와 영국의 현대식 성과 견줄 만하다. 위쪽에는 아성과 뜰이 있고, 성곽 내부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 안뜰이 2개 있으며, 바깥뜰은 주출입구와 수비 병사들이 주둔하던 구역의 흔적과 대부분 폐허가 된 큰 감시 망루로 이루어졌다. 성 앞에서 발굴한 유물에는 원형 요새를 두르고 있던 해자의 흔적, 푸초프(Puchov) 문화의 의식을 행하던 건물, 대장의 주택 터, 원형 탑의 흔적이 있다. 14세기 초 마티아스 카크(Matthias Cak) 군대가 심하게 파손한 뒤 고딕 양식으로 다시 짓고, 출입문이 있는 큰 정착촌이 들어서면서 넓어졌다. 1780년까지 요새로 쓰이다가 대화재 후 폐허가 되었다. 스피슈스케 포드흐라디에 마을은 성 아래쪽에 정착촌으로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요새의 일부였으나 곧 성과 별개로 독립 마을이 되었다. 최초로 지은 교회는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파괴되었다. 1258년~1273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다시 지었는데, 처음에 성을 건설했던 이탈리아의 석공들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 1321년에 도시로 특권을 인정받았으며 15세기 색슨족 공동체에 공급하는 직물 제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도시의 많은 부분이 재건되고 요새화되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도로가 14세기에 정식으로 배치되었고 15세기에 넓어졌다. 화재가 난 뒤 주택 대부분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다. 도시 중심에는 성모 마리아 교회(the Church of the Blessed Virgin Mary)가 있고, 주변에는 타운하우스가 둘러싸고 있다. 아직도 많이 남은 석조 2층 주택들은 후기 건축 구조(주로 르네상스 양식)를 띤다. 교회를 낀 둥근 광장은 15세기에 생겼다. 중앙의 광장 남동쪽 가까운 곳에 자비의 형제 수도회 교회(Order of Brothers of Mercy)와 수도원과 함께 바로크 양식의 주택 단지가 있다. 요새화된 종교 도시인 스피슈스카 카피툴라(Spi?ska Kapitula)는 스피슈스케 포드흐라디에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요새 마을에서 시작했다. 성 마르틴 성당(Cathedral of St Martin)이 중심인 복합 건물은 1285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측랑이 3개인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로, 서쪽 끝에 설교단이 있고, 이중 첨탑이 있었다. 현재 모습은 고딕·르네상스·바로크 양식으로 잇달아 개조하고 확장한 것이다. 주로 바로크 양식으로 된 주교궁은 많은 종교 건축물처럼 내부 장식이 화려하다. 도시 중심부가 타원형 구조인 것은 14세기에 요새화되었기 때문이다. 여러 종교 건축물이 초기에는 방어 기능을 했다. 수도원 건물을 새로 지을 때 주임 신부의 사제관도 다시 짓고 전체를 요새화했다. 초기의 중심 요새는 18세기에 없어졌다. 성 마르틴수도원에 있던 성은 주임 신부의 관저로 쓰였고, 나중에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1241년~1243년에 타타르족이 파괴했으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둥근 지붕을 얹은 원형 건축물로, 순례자의 예배당이었다. 수도원은 15세기에 없어졌지만 예배당은 18세기까지 있었다. 성 마르틴 성당이 중심이 되는 복합 건물들은 1285년에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측랑이 3개인 로마네스크 바실리카로, 서쪽 끝에 설교단이 있었고 이중 첨탑이 있었다. 사제 관저는 1281년에 완성되었고 종교 건물을 더 많이 지었다. 불가리아 약탈자들이 자주 습격을 해 14세기에 요새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성당은 14세기 후반에 재건되었다. 1776년에 주교의 관저가 되었다가 4년 뒤에 신학대학이 되었다. 1819년에 이곳에 헝가리 최초의 교원 양성 기관이 생겼다. 제흐라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슬로바키아의 정착촌이다. 봉건시대에는 마을 영주의 저택이 딸린 성의 소유지였다. 1275년에 성령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pirit)를 크게 지었는데, 그 교회의 중세 벽화는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 레보차 이 유적지는 모라비아 왕조 시대에(9세기)에 중요한 군사 훈련지였다. 현재 도시에 있는 여러 건축물의 유적은 11세기와 12세기에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려 준다. 레보차 도시의 발달은 초기 게르만인의 식민지와 관련이 있는데, 1241년 몽골이 황폐화한 이후 13세기 중반에 점점 늘었다. 이 마을은 1249년의 기록물에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1271년 헝가리 왕 스테판 5세(Stephen V)가 스피슈 지역의 색슨족에게 주었다. 스피슈와 레보차는 색슨족 주둔군의 중심지였다. 레보차는 1271년 법으로 행정수도((Communitas Saxonum de Scepus)가 되었다. 자유도시로 승격된 뒤 색슨족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주민이 개인의 자유와 토지와 하층토를 자유롭게 개발할 권리, 개인의 재산권 등을 얻는 한편 자치권도 갖게 되었다. 헌장에는 요새를 지을 권리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1319년 기록을 보면 요새가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1380년에 제정된 또 하나의 법(Zipser Willkur)은 이런 특권을 공식화하며, 특히 종교로 확대했다. 그 대신 헝가리 왕국에 부속임을 재천명했으며 통치 세금을 개정했다. 14세기에 ‘24개 스피슈 도시 동맹’을 설립하여 왕국의 속주가 되었으나, 수도 레보차는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인 왕실 도시 지위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요새를 합리적인 도시 구조로 배치했다. 14세기 초기에 이 마을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근처 언덕에 자리한 마리안스카 교회(Marianska Chapel)를 오가는 순례가 성행했다. 그 순례는 오늘날까지 정기적으로 계속된다. 이 지역은 폴란드, 실레지아, 모라비아, 헝가리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있어 번창했다. 레보차는 중세 말에 무역 중심지가 되고 자유 도시 역할을 하면서 합리적 도시 구조를 갖추었으며, 성벽 안에는 수많은 상인과 장인이 거주했다. 1321년의 헌장에서 이 도시에 매우 유리한 화물 집산지 자격을 주어 이 지역은 유럽 무역의 기착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크라카우(Cracow), 브로츠와프(Wrocław), 데브레첸(Debrecen)과 정기적으로 교역했으며, 더 멀리 게르만 영토와 오스트리아, 발칸 반도와도 교역했다. 중세에 수공업자 길드가 생겨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런 길드가 서른 여개나 되었다. 재단사, 양철공, 석공, 단추 제작자들이 명성을 얻었고 국내외 무역에 참여했다. 1421년에 스피슈 주의 일부가 폴란드에 이양되어 레보차는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잃었다. 그리고 11개 도시로 줄어든 지구의 선두에서 합법적 역할을 맡았다. 15세기 말에 레보차는 지역의 수도 지위를 잃고 다시 스피슈 성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도시는 여전히 특별 지위를 유지하면서 헝가리 왕국의 통치를 직접 받았다. 1419년과 1492년의 헌장에서는 도시의 상인들에게 상업 활동의 세금과 왕국 전 지역의 통행료를 면제해 주었다. 레보차는 중요 무역 도시로서 여러 지역과 문화를 연결하는 기착지였다. 투르조(Thurzos)와 롤스(Rholls) 같은 대 상인 통치자가 유럽에 등장했다. 투르조는 슬로바키아의 광업에 관여하여 15세기 말에 헝가리 왕국의 구리를 지배하기로 아우구스부르크의 푸거가(Fuggers)와 협정을 맺었다. 반대로 폴란드, 실레지아, 오스트리아의 무역 가문들은 레보차에 중개소를 두었다. 이 도시는 큰 시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다. 15세기와 16세기에 도시의 방어 체계를 강화하고, 도시 구조를 더 짜임새 있게 계획했으며, 석조 건축물을 많이 지었다. 지적도 체계를 만들어 도시 정면의 선과 치수를 의무적으로 따르게 했다. 1550년, 1561년, 1599년에 화재가 발생한 후에는 새로 짓는 건축물과 개조 건물에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따르게 했다. 재건한 시청사와 상점 거리가 이 시기의 대표 건축물이다. 레보차는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에 힘입어 요새 시설을 개조하고 고도의 도시 구조를 갖추어 계속 성장했다. 특히 스피슈 지구의 행정을 담당하는 귀족과 종교 기관을 끌어들여 지역의 종교 시설 권력의 많은 부분을 되찾았다. 르네상스 시대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레보차는 특히 15세기 초에 높이 평가받던 시립 학교를 통해서 지역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학생이 여러 동유럽 대학으로, 특히 크라카우로 유학을 떠났다. 1517년에 도서관을 건립하고 1557년에는 서점이 문을 열었으며, 1625년에는 슬로바키아에서 최초로 인쇄소가 생겼다. 반종교개혁이 있은 뒤 레보차에는 복음주의 기독교와 로마 가톨릭 김나지움이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생겼다. 16세기에는 유럽에서 명성이 높았던 인문주의자 얀 헨켈(Jan Henckel)이 태어났다. 문화와 과학 분야의 거장들의 고향이었으며, 약국이 들어서기도 하였다. 유명한 음악가들이 태어났으며, 복음주의 교회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이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레보차는 후기 고딕 시대에 발전했던 조각과 회화의 중심지였다. 많은 화가가 이 풍요로운 상업 도시로 모여들었다. 이런 움직임의 절정기는 거장 파울의 작품으로 나타난다. 처음에 파울은 성 야곱 교회(St Jacob’s Church)의 제단을 만들었다. 1530년에는 레보차에 조각 작업장을 세우면서 유명해졌다. 특히 조각과 회화에서 17세기와 18세기의 예술적 전통이 이 도시에서 이어졌다. 레보차는 중유럽에서 바로크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이곳 생산품이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로 널리 보급되었다. 스웨덴, 폴란드, 보헤미아 등 외국의 예술가에게도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의 예술가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빈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도시의 상업·문화·예술 활동은 18세기와 19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지역 과학학회가 생기고, 1827년에는 극장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겹쳐 도시의 상업적 지위가 약해졌다. 이곳은 철도가 놓이지 않아 19세기 말에 일어난 산업혁명이 미치지 않았다. 그 뒤 급속히 쇠퇴했으며, 스피슈 주의 수도 기능을 되찾지 못하고 1922년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이 들어섰다. 도시 계획의 관점에서 18세기는 바로크 양식의 종교 복원이 두드러졌으나 요새 체계는 약화되었다. 19세기 초에 여러 공공건물 공사를 시작하여 교구 교회의 종탑 재건에 이어 복음주의 교회와 지역 청사도 건축했다. 도시에도 공사를 진행하여 도로에 조약돌을 깔고 공공조명을 설치했다. 요새는 일부가 무너졌고 19세기 말에는 병영으로 대체했다. 1911년에 김나지알니(Gymnazialny) 교회를 아르누보 양식으로 재건축했다. 1950년에는 성 야곱 교회 내부, 특히 거장 파울의 작품 복원 공사를 시작했다. 이 복원 공사는 코트르바가(Kotrba family group)의 장인들이 수행했는데, 회화와 석조, 목조, 다색화, 금박의 전문가들이 몇 십 년 동안 공사를 감독했다. 그러나 다른 보수 공사도 필요하여 1989년에는 성 니콜라스 제단, 2003년~2004년에는 성탄도(예수 탄생 모습을 그린 그림) 제단을 보수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자주찾는 메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