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브림스톤 힐 요새 국립공원 / Brimstone Hill Fortress National Park
- 국가명
- 세인트키츠네비스
- 등재연도
- 1999
- 등재기준
- (iii)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위치
- 세인트토마스, 세인트크리스토퍼(세인트키츠) 교구(Parish of St Thomas, St Christopher(St Kitts))
- 좌표
- N17 20 48.984 W62 50 13.992
- 간략개요
- 브림스톤 힐 요새 국립공원(Brimstone Hill Fortress National Park)은 카리브 해 지역에 있는 17세기~18세기 군사 건축물의 뛰어난 전형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요새는 영국인이 설계하고 아프리카 노예 노동자들이 건축한 것으로, 유럽의 식민지 확대 정책과 아프리카 노예무역, 그리고 당시 카리브 해 지역에 새로운 주변국 사회가 나타난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 정당성/가치
- 브림스톤 힐 요새 국립공원은 역사·문화·건축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건축물을 설계하고 감독한 영국 군사 기술자들의 독창성이 간직되어 있다. 또한 건축물을 직접 짓고 유지했던 아프리카 노예들의 기술과 강인함, 인내가 서려 있다. 이 요새의 건축학적 특징은 설계가 각기 다른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유럽 제국주의의 전형과 카리브 해 지역의 독특한 문화가 이곳에서 혼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새는 세계사의 한 결정적 시기에 권력과 부를 위해 서로 경쟁했음을 상징하고 있으며, 카리브 해 지역의 역사·생태·지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도 하다. 신생국가 지방의 관리인들은 예전 노예의 후손들이 대부분이다. 요새는 식민지의 아픔을 겪은 아프리카 사람들과 외부와 혼합되지 않았던 카리브 해 지역문화의 순수함을 나타내는 상징이며, 식민 후기시대를 살았던 다른 신생국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세인트키츠 섬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이에서 ‘리아무이가(Liamuiga, 비옥한 섬)’로 알려진 곳으로, 1623년 영국인과 1625년 프랑스인들이 함께 정착한 최초의 카리브 해 섬이었다. 위트레흐트 조약(Treaty of Utrecht)을 통해 영국이 단일 통치를 하게 된 1627년과 1713년 사이에 이 두 나라가 이곳을 공유하고 있었다. ‘엄마의 섬’이라고 알려진 이곳은 영국과 프랑스의 카리브 해 식민화에 대표적인 유형이 되었고, 그 발판을 제공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던 초기부터 아프리카 노예들이 들어왔으며, 세인트키츠와 다른 초기의 식민지들은 설탕 생산과 노예제도를 토대로 하는 농장 체계의 전신이 되었다. 혼합주의가 생겨 유럽과 아프리카의 문화요소들이 서로 융합했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적 흔적도 간간이 세인트키츠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90년에는 언덕 바로 아래의 포트 찰스(Fort Charles)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기 위해 영국이 북서면에 대포를 설치하고, 브림스톤 힐을 군사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1706년 프랑스의 침공 사건을 계기로, 군사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이곳으로 도피했다. 1782년에 요새가 프랑스군에 포위되어 영국군은 한 달간 저항하다가 프랑스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세인트 전투에서는 영국이 프랑스에게 압승을 거두면서 영국 해군의 우월함을 만방에 떨쳤다. 1783년의 베르사유 조약(이 조약으로 북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가 독립함)으로 영국은 섬을 다시 넘겨받았고, 이 시기에 재건축과 투자를 강도 높게 시작했다. 세인트키츠 섬은 가공할 만한 방어시설을 구축하면서 ‘카리브 해의 지브롤터’로 알려졌다. 1806년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물리치면서 카리브 해의 식민지 섬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새는 1853년에 영국의 방어시설 감축정책으로 버려졌다. 목조 건물들은 경매로 내놓거나 분해했으며, 석조 건축물들은 점차 자연의 식물들에게 잠식당했다. 브림스톤 힐은 높이가 230m이며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쌍둥이 층상스러스트(upthrust, 경사각이 큰 역단층)로, 표면에는 대부분 석회암이 덮여 있다. 작은 관목이 우거져 있고, 몇 군데에는 암반지대가 드러나 있다. 더 깊숙한 지역과 협곡지대에는 큰 나무들이 조밀하게 숲을 이룬다. 요새는 바다에서 퍼붓는 공격에 대비해 영국군이 주둔하던 섬의 해안가에 세워졌다. 그리고 적이 침입할 경우, 영국 해군이 주변의 해상을 장악하고 육지로 침투한 군대를 항복시킬 때까지 도피처로도 쓸 수 있게 지었다. 이와 같이 에스파냐 요새들과 이곳은 전략적으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언덕 ⅓지점의 각기 다른 높이에 있는 주요 건축물들은 돌무더기와 석조 벽돌(현무암)을 입혔다. 지역에서 나는 석회암으로 바깥 모퉁이(quoins)를 장식했고, 총안과 출입구 방향에도 석회암을 사용했다. 요새로 들어서자마자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보루(Barrier Redoubt)인데, 이곳에는 방어벽과 작은 포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탄약고와 위병소로 쓰였다. 다음은 저수지와 물탱크가 달린, 견고한 매거진 보루(Magazine Bastion)가 있는 구조물이 북서쪽에 나타난다. 이것은 남서쪽의 주요 구조물인 오릴론 보루(Orillon Bastion)와 막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매거진 보루와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폭탄을 견디는 무기 저장고(Ordnance Storehouse)이다. 이 보루 내부에는 의무실이 있었지만, 현재는 토대만 남아 있다. 성벽 밖으로는 묘비들이 줄지어 선 작은 묘지가 있다. 방어벽 위로는 거대한 웨일즈 왕자 보루(Prince of Wales Bastion)가 서 있다. 일직선으로 나열된 열주(지붕을 떠받치도록 일렬로 세운 돌기둥)로 받친 지하층 보병 장교들의 막사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위를 덮은 저수 시설들, 3곳의 지하 물탱크, 개방형 탱크로 이루어진 대형 저수 시스템과 마주하고 서 있다. 포병 장교들의 막사는 폐허가 된 벽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부엌은 복원했다. 급양부 마당(Commissariat Yard)에 있는 준위 장교들의 막사와 급양부 창고 건물도 재건했다. 북-동 건물로 알려진 성벽에는 몇 개의 막사 구역이 있지만, 여전히 복구가 덜 된 상태이다. 요새의 심장부는 포트 조지(Fort George) 요새로 거대한 석조 건물이며, 이곳에서 가장 높이 솟은 쌍둥이 요새 중 하나이다. 이곳도 여전히 복원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 건축물은 가장 초기의 형태로 현존하는 영국 요새 유형의 전형이면서 ‘다변형 체계(polygonal system)’로 알려져 있으며,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독특하게 지어진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