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감지그라드 로물리아나, 갈레리우스 궁전 / Gamzigrad-Romuliana, Palace of Galerius
- 국가명
- 세르비아
- 등재연도
- 2007
- 등재기준
- (iii)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179㏊
- 위치
- 세르비아 동부(Eastern Serbia)
- 좌표
- N43 53 57.5 E22 11 10
- 간략개요
- 세르비아 동부에 있는 갈레리우스(Galerius) 궁전은 후기 로마 시대의 요새화된 궁전과 기념 복합 단지이다. 이 궁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에 로마 황제 카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Caius Valerius Galerius Maximianus)의 명령에 따라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황제의 어머니 이름을 따 펠릭스 로물리아나(Felix Romuliana)라고 하였다. 요새, 복합 단지의 북서부에 있는 궁전, 바실리카, 사원, 목욕탕, 기념 단지, 테트라필론(Tetrapylon, 출입구가 4개 있는 건물)을 포함한 이 건물군은 독특하게도 의식과 기념 기능을 겸비한다.
- 정당성/가치
- 감지그라드의 요새화된 궁전은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에 사두정치 체제의 부제(副帝, caesar)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의 계승자인 카이우스 발레리우스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건설했다. 이는 목욕탕을 발굴할 때 황제의 것과 유사한 머리 조각상을 발견하면서 입증되었다. 사두정치 체제에서는 황제가 20년을 통치한 뒤 왕위에서 물러날 때 퇴임을 축하했다. 갈레리우스도 그의 사상적 아버지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념을 따라 성벽으로 둘러싼 궁전을 지어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갈레리우스는 297년에 페르시아의 나르세스(Narses) 왕에게 승리한 뒤에야 요새 궁전 건축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 칭호를 받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양자로 상속자가 된 뒤 자신이 태어난 다키아 리펜시스(Dacia Ripensis, 오늘날의 세르비아 동부)에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이곳 이름을 다키아 사람인 어머니의 이름 로물라를 따서 로물리아나 요새라고 지었다. 발굴 당시에 월계관과 함께 발견된 장식 창틀 조각에 둥글게 펠릭스 로물리아나라고 새겨져 있었다. 요새의 내부 북서쪽에 있는 궁전과 작은 사원은 공사 첫 단계에서 건설했다. 306년에 콘스탄티누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죽은 뒤 갈레리우스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서 보니 요새가 너무 초라해 보여 진행 중이던 공사를 밀쳐두고 이미 세운 건물을 둘러싼 더 웅장한 요새를 짓기로 하였다. 복합 단지 남쪽에 유피테르(Jupiter) 신에게 헌정하는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새로운 건물은 다양한 재료로 지어 상징적 의미가 가득하며 더욱더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특징적이다. 갈레리우스는 요새 궁전의 동쪽 언덕에 자신과 어머니의 묘지를 봉분 형태로 만들고 축성 기념비를 옆면에 세웠다. 이 기념비는 자신을 신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신격화와 관계가 있다. 카이사르가 된 갈레리우스는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고, 나중에 아우구스투스 지위에 오르고 나서는 유피테르와 동일시되었다. 통치자 신격화는 사두정치 체제의 특징이었다. 신의 화신으로서 어머니에게 신들의 궁전을 선사하고 싶었던 갈레리우스는 신격화를 통해 로물라에게 신의 불멸성을 보장했다. 교차로를 나타내는 테트라필론을 로물리아나로 이어지는 로마의 길과 기념 단지로 가는 길 교차로에 세워 지상의 길과 천국의 길이 만난다는 것을 표시했다. 모든 건축물 건설에 마케도니아 부대가 주요 역할을 했는데, 이 부대는 동부 전투에서는 갈레리우스를 위해 싸웠고 평화로울 때는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311년에 황제가 죽은 뒤에도 궁전은 계속 사용했으나 왕실 의식은 없었다. 궁전과 여러 건물은 개조한 뒤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5세기 말까지 궁전은 소리 없이 쇠퇴하다가 왕좌 홀을 측랑이 3개 있는 기독교 바실리카로 개조했다. 당시에 궁전 동쪽 면을 따라 중앙에 아트리움이 있었고 애프스(apse)가 있는 다른 건물이 생겼다. 새 건물에는 세례반(洗禮盤)처럼 보이는 작은 대리석 연못이 딸려 있었다. 방어물이던 탑 몇 기는 새로운 거주민에게 필요한 물건을 만드는 공예품 가게로 바뀌었다. 이때 로물리아나는 법원 관리가 거주하던 중요한 마을 공동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 중엽 이 복합 단지는 훈족의 습격으로 심각하게 손상을 받고 불에 탔다. 5세기 중반에서 6세기에 로물리아나는 재건되었으나 이전의 화려함을 되찾지는 못했다. 새로 지은 건물은 크기나 건축 방식에서 더 발전하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기에는 약간 확장을 했다. 이때 건축에서나 공간에서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웅장한 측랑 3개가 딸리고 꽃잎 모양 세례반이 4장 있으며 모자이크가 아주 아름다운 바실리카가 궁전 복합 단지에 들어서 기존 건물을 무색하게 했다. 동쪽에 있던 문은 버리고 서쪽 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했다. 갈레리우스 신전과 궁전에서 나온 건축 장식의 조각은 건축 재료로 다시 사용했다. 7세기 초에, 아바르인(Avars)과 슬라브족의 잦은 습격으로 이 유적지는 버려졌다. 9세기 초가 되어서야 이전의 궁전에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이때 복합 단지 동쪽에 중세의 작은 정착촌이 발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