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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유산명)
생루이 섬/ Island of Saint-Louis
국가명
세네갈
등재연도
2000
등재기준
(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위치
생루이 지역(Region of Saint-Louis)
좌표
N16 1 40.008 W16 30 15.984
간략개요
17세기에 프랑스 식민지 정착민이 건설한 생루이(Saint-Louis)는 19세기 중반에 도시로 발전했다. 이곳은 1872년~1957년에 세네갈의 수도였으며 서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중요한 문화적·경제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곳은 세네갈 강의 어귀에 있는데, 일정한 도시 배치와 부두 시스템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건축물이 생루이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도시의 독특한 외관을 만들었다.
정당성/가치
서아프리카의 옛 수도였던 생루이 섬은 독특한 자연경관을 지닌 식민도시의 보기 드문 사례이다. 생루이는 이 지역에서 발달한 식민 행정부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서아프리카 지역에 이루어진 교육·문화·건축·공예·서비스 등 다양한 가치의 교류와 발달에 영향을 미쳤다. 생루이 섬은 유럽인이 도착하기 전에는 무인도였다. 이곳은 왈로(Walo) 왕국에 속했고 15세기부터 포르투갈, 베네치아, 네덜란드 사람들의 탐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곳에 거주지가 생기면서, 특히 17세기에 주도권 다툼이 많았다. 1633년 프랑스는 최초의 회사인 케이프베르데사(Cap-Vert Company)를 세네갈에 세우기로 했다. 세네갈 강 어귀에 있는 이 섬은 1659년 프랑스 사람 루이 콜리에(Louis Caullier)가 이곳을 회사의 방어 시설로 채택하였다. 이곳에는 케이프베르데사에 뒤이어 다른 회사들도 설립되었다. 영국은 1693년, 1779년, 1809년~1817년에 생루이를 점령했다. 초기에는 사람이 지내기 힘들고 척박한 환경이었다. 대량의 굴(oyster) 껍데기 조개무지가 발견되어 석회 원료로 도로를 건설할 때까지 거주할 만한 건물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거주지가 생기고 상업 활동이 발달하면서 고무, 가죽, 금, 상아, 곡물류, 노예무역이 활발해졌다. 이에 덧붙여 교육에 필요한 학교도 필요하게 되었다. 19세기 초 이곳의 인구는 8,000명에 달했다. 1828년 종합 도시 계획을 세워 도시의 기본 참조 모델인 옛 요새에서 발달한 도로 패턴과 도시 발달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도시 발달은 루이 페데르브(Louis Faidherbe)가 총독으로 임명된 185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생루이 섬의 도시화는 1854년~1865년에 진행되었다. 생루이는 1872년 세네갈의 수도로 선정되었고 1895년 서아프리카의 수도로 지명되면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 생루이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진 도시들의 중심지이자 문화와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다. 1864년 3월 15일 서아프리카 최초로 생루이에 산업, 민족, 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에 학교 시설, 공공기관과 여러 서비스 시설 그리고 최초의 세네갈 군부대와 무슬림 재판소가 세워졌다. 식민시대의 안정된 평화 덕분에 경제와 상업 활동이 발전했다. 그 결과 도시의 영향력이 커지고 팽창하게 되었다. 하지만 1902년 생루이는 서아프리카 수도 지위를 내놓았고, 1957년에는 세네갈의 수도 자리도 내놓았다. 이는 프랑스 주둔군의 철수를 의미하며 그들의 가족과 사무실, 프랑스 상점도 모두 물러가고 문을 닫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63년 세관 건물이 마지막으로 폐쇄되었다. 그러자 프랑스인의 인구는 급감하였다. 그러나 전체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 1960년에 55,600명, 1976년에는 90,000명, 1997년에는 150,000명에 달했다. 도시는 랑그 드 바르바리(Langue de Barbarie, 대양과 마주한 산등성이) 지역과 내륙의 소르 지역이 동시에 발달했다. 옛 시가지는 인구 과잉으로 낡은 건축물이 붕괴되거나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1983년 새로운 도시의 종합 계획을 마련하여 위험한 환경 상황을 규제하고 역사 지역 보호 정책을 보급하였다. 오늘날 도시는 경제는 어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관광 산업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 1992년 가스통 베르제(Gaston Berger) 대학이 개교했다. 최근 새 국제공항이 개항되어 생루이를 더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생루이 역시 여느 아프리카 대도시처럼 관계 당국이 환경 문제와 토지 불법 사용과 같은 고민거리를 안겨주고 있다 생루이 섬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북쪽과 남쪽의 거주지 그리고 정부 청사가 들어선 페데르브 광장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가 그것이다. 전체 거주 지역은 세네갈 강의 두 지류로 형성된 거대한 석호 안에 있다. 이 마을은 해안 지역과 내륙의 소르(Sor) 지역에서 갈라진다. 무스타파 말릭 가예(Moustapha Malick Gaye, 예전의 세르바티우스) 다리는 섬과 대양으로부터 섬을 막아주는 서쪽의 랑그 드 바르바리 산등성이로 연결되어 있다. 1897년에 개통된 페데르브 다리는 도시 중앙과 소르 지역을 연결한다. 옛 시가지 구조는 1828년에 건설된 직교하는 격자 평면 구조를 기초로 만들어졌다. 이는 기본 참조 모델인 옛 요새에서 발전한 도로의 패턴과 도시 발전을 규제하기 위해 계획된 구조이다. 이 섬은 항만 시스템으로 둘러싸였는데, 이는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 섬의 모든 도로 번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도시 구조가 생루이만의 특별함과 개성을 더해 준다. 2, 3층으로 된 건축물들은 쇠창살과 목재 발코니, 붉은 타일로 마무리한 지붕, 목재 덧문이 달린 창문과 출입문의 형태에서 식민지 건축물의 건축학적?미학적 느낌을 풍긴다. 주요 역사 건축물에는 주 청사인 고대 요새가 첫 거주지가 형성된 섬의 중심에 있다. 건축물들은 몇 세기를 거치는 동안 실내 장식이 많이 변형되었다. 그러나 외부 장식은 추가 장식을 조금 한 것 외에는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주 청사 바로 옆에 자리한 성당은 시민들의 기부로 1828년에 완공되었다. 군대 막사(Rognat Nord와 Rognat Sud)는 1837년 페데르브 광장이 있는 도심에 건설되었다. 주 청사와 함께 이 건축물들은 세르바티우스 다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도시의 핵심부에서 고전 건축물 지역을 형성한다. 1825년부터 지방의회(Regional Assembly for the River)가 있었는데, 초기 형태는 매우 단조로웠다. 1839년 초등학교 건물로 확장되었다가 1873년 이후 식민지 기록 보관소로 다시 사용되었다. 이어 다양한 공공기관 터로 제공되었다. 이곳은 규모가 상당히 큰 단지로 벽기둥과 발코니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수 공사를 하여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1822년에 건립된 시민 병원을 포함해서 북쪽의 대 모스크와 다른 건축물은 1838년에 짓기 시작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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