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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산명)
비에슈그라드의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 / Mehmed Pa?a Sokolovi? Bridge in Vie?grad
국가명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재연도
2007
등재기준
(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1.50㏊
위치
스르프스카 자치공화국(Republika Srpska), 사라예보 광역 지역(Sarajevo Macro Region)
좌표
N43 46 53.2 E19 17 16.89
간략개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동쪽을 지나가는 드리나 강(Drina River)을 가로지르는 비에슈그라드의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Mehmed Pa?a Sokolovi? Bridge in Vie?grad)는 16세기 말 궁정 건축가인 미마르 코카 시난(Mimar Koca Sinan)이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Mehmed Pa?a Sokolovi?) 수상의 명을 받아 건축하였다. 이 다리는 오스만 제국의 기념비적 건축과 토목 공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11~15m간격으로 11개의 석조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강의 왼쪽 제방으로 갈 수 있도록 오른쪽 아치 부분에는 4개의 램프가 설치되어 있어 강의 좌측 제방으로 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총 길이179.5m의 이 다리는 고전적 오스만 시기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기술자였던 시난의 대표작이며, 동시대인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와 비견될 만한 작품이다. 이 전체 유적의 우아한 비율과 기념비적인 고급스러움은 당시 건축 양식의 특별한 위대함을 보여 준다.
정당성/가치
탁월한 보편적 가치 비에슈그라드에 있는 이 다리의 보편적인 가치는 역사적 이유에서나 건축적 가치의 관점에서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 중 한 명에 의해 세워진 이 다리는 토목 공학과 교각 건축의 중요한 단계를 보여 준다.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적절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적용한 이 다리는 다른 지역과의 문화적 교류에 대한 증거도 보여 준다. 이는 오스만 건축과 토목 공학 기술 적용의 고전적인 정점을 대표한다. 이런 상징적 역할은 역사 과정 속에서 매우 중요했으며, 특히 20세기에 발생한 잦은 분쟁 속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다리가 지닌 문화적 가치는 국가와 문화의 경계를 초월한 것이다. 완전성과 진정성 다리를 중심으로 한 이 유산은 접근 가능하도록한 램프, 두 강의 제방, 그리고 상류와 하류는 드리나 강의 동쪽 제방에 있는 완충지역으로 보호받고 있다. 이 다리의 완전성은 취약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적절하게 완충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다리의 가치를 적합하게 표현하고 있다.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 다리가 가로지르는 드리나 강은 발칸 지역의 산악 지대로부터 물을 끌어서 사바 강(Sava Rivers)과 다뉴브 강(Danube Rivers)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홍수에 취약했던 이 다리의 난간은 1896년 홍수로 범람되었으며, 양차 세계 대전 동안 심하게 훼손되었다. 임시 보수를 한 후 1950년대 초에 석조로 재건축되었다. 이처럼 끊임없이 보수와 복구를 한 덕택에 여러 차례의 큰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 원래의 모습은 대체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강의 수위에 영향을 미치는 2개의 수력발전소(보스니아와 세르비아에 각각 하나씩 있는)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리는 여전히 취약하다. 이와 같은 위협을 덜기 위해 세르비아의 광산 및 에너지부는 2007년 6월 27일에 보스니아의 국가적 기념물을 보존하는 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세계유산 리스트에 등재하는 것을 지지했으며, 다리를 보존하기 위해 이 강에서 행하고 있는 수력발전 운영의 영향을 분석하는 두 나라간의 실무진을 구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시도는 법적 보호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관리 계획을 보완할 것이다. 역사적 배경 비에슈그라드 다리는 오스만 제국의 3명의 술탄 통치 시대 중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집권했던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 수상(1505~1579)이 의뢰하여 건설한 것이다. 이 다리 건축을 의뢰한 것은 그의 고향 지역을 위한 것이었다.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이러한 종류의 건축물을 지음으로써 당시의 권력의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 다리는 이스탄불에서 온 오스만 제국에 의해 내부 발칸 지역의 계획과 통제라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었다. 이곳의 발전으로 인해 다뉴브 평야를 사라예보와 아드리아 해, 특히 라구사(두브로브니크)의 자유 항구를 잇는 루트가 형성되었다. 다리의 건축 기간은 오스만 제국의 정점인 시대에 지어졌으며, 이후 술레이만 대왕(1520~1566) 통치 시대가 이어졌다. 이때는 이 지역에 평화와 번영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비에슈그라드 다리의 디자인과 건축을 위해 오스만 제국 건축의 수장이었으며 위대한 궁중 건축가이자 기술자였던 미마르 코카 시난이 선택되었다. 그는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모스크, 다리, 토목 건축물을 건설하는 등 이미 메흐메드 파사 소콜로비차를 대신하여 사회적·종교적으로 중요한 많은 건축물을 건설했던 인물이었다. 시난은 오스만 제국의 정점에서 전형적이며 고전적인 건축물을 건설한 대표인물이다. 1571년~1577년에 건설된 비에슈그라드 다리에는 상당한 인력이 동원되었으며, 재정도 많이 투입되었다. 다리는 튼튼하게 건설되었으나, 2세기 반에 걸쳐서 주로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 1625년과 1875년에 복구 작업을 한 기록이 있다. 1898년 큰 홍수로 인해 이 다리 전체가 잠겨 교각이 흔들리고 들어 올려졌으며 난간이 떠내려가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1911년과 191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기술자들에 의해 교각을 안정화하고 강화하는 상당한 작업이 실행되었다(교각 4, 5, 6, 7, 8과 9). 당시 다리는 세르비아와의 경계에 위치했기 때문에 군사적인 전략면에서도 매우 중요했으므로, 더욱 두꺼운 석재 난간을 새로 설치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교각 3과 4가 다이너마이트로 인해 폭파되었다(1914~1915). 전쟁이 끝난 후 원래 다리에서 남아 있는 부분을 지탱하고 있던 강철 대들보를 임시적으로 보수했다. 1939년과 1940년에는 원래 디자인을 따라 석재로 재건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3년에는 5개의 다리 아치가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이로 인해 교각 3, 4, 5와 6이 영향을 받았다. 파괴된 아치는 1950년~1952년에 교통 및 도리 관리부에 서 재건했으며 부분적인 모델이 여전히 온전하게 남아 있다. 1966년에 바지나 바스타(Bajina Basta) 하류 수력 발전소가 건설되었고, 1989년에는 그곳에서 2.5㎞ 떨어진 지역에 비에슈그라드 상류 수력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이 두 건설 작업은 상대적으로 비에슈그라드 다리와 가까워서 강 흐름의 수압 비율을 본질적으로 바꾸어놓았다. 다리 관리 측면에서는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다리를 분석하여 교각 5, 6과 8에서 기반의 복원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기금 부족으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1986년에는 이 역사적인 다리의 기능을 복제하는 현대적인 다리가 1㎞ 하류 쪽에 건설되었다. 1992년에는 교각 2의 복원 작업을 시작했으나, 교각 5, 6과 8처럼 역시 기금 부족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1992년~1995년에 벌어진 전쟁은 비에슈그라드 다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왼쪽 제방에 있는 진입 경사로는 1991년에 문화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복구되었으며, 2003년에는 다리 상태로 인해 구조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동차 출입을 금지했다. 1986년에는 이 역사적인 다리의 기능을 복제하는 현대적인 다리가 1㎞ 하류 쪽에 건설되었다. 등재기준 기준 (ⅱ) : 전략적 중요한 지역에 위치한 이 다리는 그 긴 역사 속에서 발칸, 오스만 제국, 그리고 지중해 세계, 그리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중요한 문화적 교류 증거이다. 이 다리의 관리와 보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 힘과 관련이 있었다. 오스만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연방,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순으로 변경되었다. 기준 (ⅳ) : 비에슈그라드 다리는 오스만 제국의 고전적 시기 동안 정점에 있던 뛰어난 건축의 일례이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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