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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산명)
틀라코탈판 역사 기념물 지대 / Historic Monuments Zone of Tlacotalpan
국가명
멕시코
등재연도
1998
등재기준
(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위치
베라크루스 주(State of Veracruz), 틀라코탈판(Tlacotalpan Municipality)
좌표
N18 36 30 W95 39 30
간략개요
멕시코(Mexico) 걸프 만 해안에 있는 식민 시대 항구인 틀라코탈판(Tlacotalpan) 은 16세기 중반에 건설되었다. 이곳은 원래의 도시 배치가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도시에는 넓은 거리, 주랑이 있는 풍부한 스타일과 색채의 주택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공공 개방공간과 개인정원 등이 있다.
정당성/가치
틀라코탈판 항구의 도시 배치와 건축은 스페인과 카리브 해 지역의 전통을 수준 높게 잘 융합해 표현하고 있다. 스페인 식민기의 항구 도시였던 이곳은 원래의 도시 배치가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다. 넓게 펼쳐진 도로, 색채가 풍부하고 다양한 스타일의 소규모 주택들, 울창한 아름드리나무들이 있는 공공 개방공간과 개인정원 등은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스페인 식민 시대 이전에 틀라코탈판의 북쪽과 북동쪽에 이르는 지역에 어떤 인종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나비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파파로아판(Papaloapan) 강의 이름과 인근 거주지인 나후아틀(Nahuatl)이라는 이름으로 짐작할 때, 이곳은 아즈텍(Aztec)의 지배 아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틀라코탈판의 현재 명칭은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의 틀락스코탈리아판(Tlaxcotaliapan)이 스페인어로 바뀐 것인데, 틀락스코탈리아판은 초기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던 섬의 이름이다. 그 후에 이 지역은 강의 북쪽 둑을 개간해서 본토에 병합되었다. 내륙의 강안에 자리 잡은 틀라코탈판 항구는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흔하지 않은 도시 거주지이다. 이곳은 1,550m×520m의 면적에 격자형으로 되었으며, 확연히 구분되는 2개의 구역으로 나눠져 있다. 이중에서 서쪽에 있는 스페인(Spanish) 구역이 더 크며, 동쪽은 원주민(Native) 구역이라고 한다. 두 구역이 만나는 지역은 공공 구역으로, 불규칙한 모양으로 보이는 이곳에는 공공의 개방된 장소로 공공건물, 상업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서쪽 구역은 강을 따라 평행하게 동서를 가로지르는 7개의 주도로에 맞추어 배치되어 있고, 주도로는 좁은 도로들과 연결되어 있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정복에 나선 스페인은 1518년에 베라크루스(Veracruz) 지역을 탐험하던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ba, 1489경~1527, 스페인의 탐험가)가 파파로아판 강 입구에 도착하면서 이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페드로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는 더 북쪽으로 항해를 했고, 아즈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Cortes, 1485~1547)는 곤잘로 데 산도발(Gonzalo de Sandoval)을 이곳으로 보내 금을 찾도록 했다. 틀라코탈판은 스페인 국왕이 1550년경에 가스파르 리바데네이라(Gaspar Rivadeneyra)에게 하사한 방대한 땅의 일부였으며, 리바데네이라는 이곳에서 가축을 길렀다. 그러나 현재 도시가 들어서 있는 지역에 어부들이 마을을 개척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으므로, 이곳에 성모 마리아를 위한 예배당을 짓도록 명령했다. 이로써 스페인에 의한 식민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다. 인구 통계에 따르면, 1544년에는 불과 12명에 불과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1777년에는 320명으로 늘어났다. 스페인 사람들을 제외한 인종의 인구 성장률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1808년을 기준으로 볼 때 1,156명의 인디언들과 1,616명의 파르도스(pardos, 인디언과 흑인의 혼혈)가?거주했던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1698년과 1788년, 1790년에는 화재가 발생해 도시가 크게 파괴되었다. 그 후 마지막 화재가 있고 나서 정부는 이 지역의 특징을 급진적으로 바꿔 놓는 규제책을 내놓았다. 지붕에는 타일을 덮어야 했고, 나무가 많은 공공장소와 주택은 분리되어 있어야 했다. 정부의 이런 규제에 맞추려면 돈이 많이 들었고, 돈이 부족해 재건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동쪽 지역에 ‘저렴한’ 가격의 토지를 제공해 주어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했다. 18세기 초에는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이 정착해 면화를 경작하고 재배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영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반기는 반면에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을 경시했다. 틀라코탈판은 1821년에 경제적으로 확장을 하기 시작했다. 옥사카(Oaxaca)와 푸에블라(Puebla)의 산물들을 베라크루스와 멀리 뉴올리언스(New Orleans), 하바나(Havana), 보르도(Bordeaux)까지 실어 나르는 항구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1855년에는 증기선 18척과 대형 범선 1척이 이곳을 본거지로 해서 주요 교역 물품인 원목과 담배·면화·곡물·설탕·브랜디·가죽·저린 육류·악어·왜가리의 깃털·가구·비누 등을 운반했다. 1849년에는 네자후아코요틀 극장(Nezahuacoyotl Theatre)과 시청(Municipal Palace)이 건축되었는데, 시청은 당시 10채밖에 없었던 2층 구조 건물 중 하나이다. 1865년 틀라코탈판은 중앙 정부로부터 도시(Town)의 지위를 승인받았으며, 병원과 새로운 시장 등의 공공 건축물들이 하나씩 완공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이곳은 학교 8개와 호텔 3개, 공장 9개, 단층집 100여 채, 2층집 25채, 3층집 1채, 소규모 주택 54채가 있는 도시로 번성을 구가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했으며, 1950년에서 1980년까지의 인구 증가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1859년에 5,613명이었던 인구는 1950년대에 들어 약간 늘었을 뿐이며, 현재 인구는 8,850명으로 1980년대 이후 같은 수준이다. 경제적인 역할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틀라코탈판은 여전히 중요한 문화의 중심지이다. 특히 이곳의 성모 마리아 예배당에서 열리는 축제는 매우 유명하다. 공식적으로는 2월 2일에 열리지만, 실제로는 1월 말부터 한 주 동안 많은 관광객들이 광장과 거리를 메우고 춤을 추며 축제를 즐긴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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