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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유산명)
과달라하라의 호스피시오 카바냐스 / Hospicio Cabanas, Guadalajara
국가명
멕시코
등재연도
1997
등재기준
(i) (ii) (i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위치
할리스코(Jalisco), 과달라하라(Guadalajara)
좌표
N20 40 26 W103 20 23
간략개요
호스피시오 카바냐스(Hospicio Cabanas)는 19세기 초에 고아·노인·장애인·만성질환자들을 수용하고 돌보기 위해 세워진 복합 단지로, 개방된 공간에 단순한 디자인과 규모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 20세기 초의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한 예배당은 멕시코 예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이 벽화는 당대 멕시코 최고의 벽화가인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의 작품들이다.
정당성/가치
호스피시오 카바냐스는 고아·노인·장애인·만성질환자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사회적 ? 경제적인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수용자들에게 인간애와 세심함으로 도움을 주고 놀라운 해결책을 제공하는 유일무이한 건축물이다. 예배당에 장식된 오로스코의 벽화들은 멕시코 문화의 토속적인 요소(신·희생·신전 등)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며, 동시에 스페인의 문화(왕·수도사들·성당들)를 표현하고 있다. 주된 특징으로 기계에 굴복하는 인간을 표현하며 걸작의 극치를 이룬다. 멕시코 중서부에 있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는 1542년에 넓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강의 왼쪽 둑에 건설된 도시이다. 서로 인접한 두 개의 원주민 거주지가 통합되어 주교의 관할지인 누에바 갈리시아(Nueva Gallicia) 지방의 주도가 되었다. 이 도시는 연이은 가뭄과 홍수, 심각한 서리 등으로 빈곤과 재앙을 겪었고, 결국 1791년경에 과달라하라의 주교 프래이 안토니오 알카데(Fray Antonio Alcalde)는 극빈자들을 위한 병원과 고아, 노동자들을 위한 숙소를 많이 짓도록 지시했다. 이 사업은 알카데의 후임자인 후안 루이즈 데 카바냐스(Juan Ruiz de Cabanas)가 과달라하라에 부임한 직후부터 바로 착수되었다. 1796년 12월에 사업을 시작한 그는 스페인 국왕에게 마을의 고아들과 노인들, 노숙자들을 수용할 시설로 ‘자비의 집(Casa de la Misericordia)’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이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그는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지역은 도시 외곽의 높은 지대로 깨끗하고 물 공급이 양호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1803년 9월 5일에 국왕이 이를 승인하자 고아원(Casa de Expositos)을 지어 노인들, 심신장애자들, 만성질환자들, 그리고 이들의 가족과 고아들, 부모가 있어도 아이를 양육할 수 없거나 가난한 순례자들도 다 함께 수용했다. 멕시코 시티(Mexico City)의 주교 카바냐스는 과달라하라의 임명장을 받으러 가는 길에 멕시코 건축에 많은 기여를 한 발렌시아(Valencia) 출신의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마누엘 톨사(Manuel Tolsa)와 친분을 쌓았다. 멕시코 시티의 성당 파사드와 탑을 완성하고 돔을 리모델링했던 인물이기도 한 톨사는 건설감독을 그의 제자 호세 구티에레즈(Jose Gutierrez)에게 위임했는데, 1805년~1810년에 건설된 이곳의 건축물은 대부분(예배당은 예외) 호세가 완성시켰다. 한편 멕시코 독립전쟁(1810~1821)으로 인해 미완성된 건물은 주로 반란군과 왕실군이 번갈아 가며 막사나 마구간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1821년에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중에 군대가 해산하자, 사랑의 수녀회(Sisters of Charity)에서 이곳을 관리했다. 1823년에 카바냐스가 죽자 지역 주민들은 깊은 애도를 보냈다. 이후 주 정부는 시설 전체를 완공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1828년에 건축 작업이 재개되었다. 이듬해에 호스피시오 개원을 했으나,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어 1830년대에 또다시 군사 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재빨리 원래의 기능을 회복했고, 작업이 재개되면서 예배당의 돔을 다시 지었다. 하지만 1842년의 거센 폭풍으로 예배당은 다시 손상을 입었다. 1853년에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법이 제정되어, 당시 주교는 넓은 채소밭을 두 길이 지나는 40개의 작은 구획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개인 후원자들의 후원금 덕분에 재정은 어렵지 않았다. 1858년에 호스피시오는 다시 한 번 더 막사로 사용되었고, 군대가 해산되자 호스피시오의 관리는 사랑의 수녀회로 넘어갔다. 그리고 모든 고아들은 앞으로 자신의 이름에 ‘카바냐스’를 붙일 것에 동의했는데, 이것이 취임식의 한 행사가 되기도 했다. 1872년에는 5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정도였으며, 그 후 수녀들을 퇴출시키면서 경제적인 지원이 줄어들자 1880년에 고아들의 수도 반으로 줄었다. 이런 불우한 상황은 1883년에 총독의 지시로 바로잡혔고, 1887년 442명에서 1910년 672명으로 수용 인원이 꾸준하게 증가했다. 한편 멕시코 벽화 운동의 성장은 1910년~1920년 개혁에 이어 국가의 결집과 정체성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리스코(Jalisco) 주 정부는 1930년대에 호세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를 초빙해 과달라하라에 있는 공공건물 등 많은 작업을 의뢰했고, 그는 1936년~1939년에 이곳에서 작업을 했다. 호스피시오 카바냐스의 예배당을 장식한 그의 벽화들은 멕시코 사회의 다민족적인 특성을 담고 있으며, 특히 「불의 사람(Man of Fire)」에는 풍자를 담고 있다. 예배당의 벽화들은 호세 오로스코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이다. 1980년대에 할리스코 주 정부는 호스피시오에 새롭게 문을 연 카바냐스 문화연구소를 개원해 예술과 공예학원을 열었으며, 음악과 춤을 위한 공간, 그리고 극장을 마련했다. 최근에 부가적으로 생긴 부서는 문서사무국과 주립 문화사무국이다. 정부와 국립 고고학역사연구소도 호스피시오에 학교를 복원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복합 건물인 호스피시오 카바냐스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배열이다. 특히 예배당과 부엌을 제외한 모든 건물은 단층 건물이며, 23개의 둥근 안뜰에 둘러싸여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양면이 아케이드(arcade)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호스피시오 건물을 위해 톨사가 채택한 대안은 독특하며, 스페인의 에스쿠리알 수도원과 파리의 앵발리드 기념관처럼 전체적인 어울림 속에서 건물의 핵심(근원)을 찾을 수 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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