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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유산명)
로마 제국 국경 / Frontiers of the Roman Empire
국가명
독일, 영국
등재연도
1987
등재기준
(ii) (iii) (iv)
분류
문화
유산면적
527㏊
위치
좌표
N54 59 33.4 W2 36 3.6
간략개요
로마 제국 국경은 2세기 로마 제국이 최대로 팽창했던 시기의 로마제국의 경계선을 나타낸다. 로마 제국 국경은 영국 북부의 대서양 연안에서 시작해 유럽을 거쳐 흑해(Black Sea)에 이르고, 거기서부터 다시 홍해(Red Sea)를 거쳐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대서양에 이르는 5,000㎞에 달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로마 제국 국경의 유적은 성벽, 해자, 보루, 요새, 망루와 민간인 정착지 등이다. 국경선 일부는 발굴되어 복원되었으나 일부는 파괴되었다. 독일 지역에 속하는 로마 제국 국경의 두 부분은 독일 북서부에서 남동부의 도나우 강에 이르기까지 550㎞에 달한다. 118㎞ 길이의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은 122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로마의 속주 브리타니아(Britannia)의 최북단 경계를 따라 건설된 것이다. 이 방벽은 뛰어난 군사 구역으로, 이를 통해 고대 로마의 방어 기술과 지정학적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안토니누스(Antonine Wall) 방벽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60㎞ 길이의 방어 시설로,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us Pius) 황제가 142년에 북쪽의 ‘야만족(barbarians)’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 방벽은 로마 제국 국경의 가장 북서쪽에 위치한다.
정당성/가치
? 독일 로마 제국은 전성기에 3개 대륙으로 확장되었다. 로마 제국의 경계선은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권력의 번성과 쇠퇴를 반영한다. 지금의 독일 지역에 해당하는 알프스 북쪽과 라인 강 동안에서는 기원전 55년~53년부터 15년?16년에 군사 작전이 몇 차례 벌어졌다. 이후 85년에 라인 강과 타우누스(Taunus)의 고산지를 잇는 국경이 처음 생기면서 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에 들어갔다. 이 국경은 자연 경관의 등고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후 좀 더 직선적인 형태로 국경이 정해졌고, 요새가 처음으로 세워졌다. 유사하게 라에티아(Raetia) 국경선 영역의 경계선은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가 처음 확정하였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 강 이북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트라야누스 황제 치하에서 요새가 설치되었다. 초기의 국경 방어 시설은 목조탑에서 감시할 수 있는 숲으로 이어진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 시기에는 말뚝을 박아 만든 울타리로 국경을 보완하였다. 2세기에 국경이 부분적으로 직선화되었고, 제방 또는 석조 벽과 다수의 소규모 요새들로 강화되었다. 이들 국경의 생성과 확장 연대에 관해서는 연구중이며, 확실한 일자와 순서를 파악하기 위하여 추가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북부 게르만·라에티아 국경은 3세기 후반인 260년경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 통치가 끝난 뒤 로마화된 켈트·게르만족이 국경선 안의 영토에서 이주하였고, 새로운 게르만족 정착민이 들어왔다. 방벽은 깊은 인상을 주는 주요한 지형지물로 여러 세기 동안 유지되었으나, 방벽을 건설한 이유와 그것이 사용된 내용은 신화와 전설로만 전해진다. 북부 게르만·라에티아 국경을 ‘재발견’한 것은 인문학 연구에 대한 19세기 관심과 연계되어 있다. 북부 게르만·라에티아 국경 연구를 수행한 핵심 기관은 제국국경위원회(Reichs Limeskomision)이다. 이 위원회는 1892년에 설립되었으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테오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뷔르템베르크 왕국, 바덴 대공국, 헤센 대공국, 바이에른 왕국에서 이전에 수행한 연구를 많이 참고하였다. 그 이전의 다른 연구들은 로마 유적을 연구하는 각각의 기관과 개인이 수행하였다. 19세기 초반에 활발하게 연구했던 로마 제국국경위원회가 있고, 개별 연구자로는 하나우의 빌헬름 콘라디(Wilhelm Conrady), 헤센의 프리드리히 코플러(Friedrich Kofler), 바이에른의 프리드리히 올렌슐라저(Friedrich Ohlenschlager)와 카를 포프(Karl Popp) 등이 있다. 제국국경위원회가 수행한 로마 제국 국경 연구 결과를 담은 14권의 책자 중 마지막 책자는 1937년에 발간되었다. 90개 이상의 요새와 1,000여 개의 망루, 모든 경계선 부분을 식별하고 기록하였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뒤에야 로마 제국의 국경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1959년 이래 로마독일위원회가 공개 질의를 하면서 새로운 논점을 다루었고, 그 결과가 ‘국경 연구(Limesforschungen)’ 시리즈로 지속적으로 출판되고 있다. 점차적으로 군사적 논점뿐만 아니라 민간인 정착과 국경 지방의 관계를 비롯한 다른 주제도 폭넓게 논의되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개발 붐이 일면서 유적과 국경 요소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지식과 연구에 상당히 기여하였다. 새로운 연구 기법과 항공 촬영을 이용해 독일 내 로마 제국 국경의 범위와 특징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영국 기원전 2세기부터 로마는 알프스를 넘어 골과 게르마니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카이사르는 최초로 영국 해협을 건넌 로마 장군으로, 오늘날의 영국 남동부에 일시적으로(기원전 55?54) 머물렀다. 그의 뒤를 이은 몇몇은 영국 해협 건너에 정착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브리타니아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이다. 이 과정은 43년에 시작되었으나 로마 패권이 안정되기까지는 몇 십 년이 걸렸다. 아그리콜라가 스코틀랜드의 칼레도니아인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으나, 85년에 공세가 중지되고 한 개 군단과 일부 보조 병력은 도나우 강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받았다. 군대가 철수한 뒤 경계선은 ‘돌 도로(Stanegate)’로 불리는 도로를 따라 고정되었다. 반복된 공격에도 로마는 영국 북부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국경을 따라 방대한 장벽을 처음으로 설치하였는데, 이는 로마의 방어선 중 가장 경이로운 것이다. 이 돌로 만든 벽은 타인 솔웨이(Tyne-Solway) 경계보다 약간 북쪽에 있으며, 서기 130년에서 140년에 지어졌다.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는 국경을 포스 만과 클라이드 만의 경계로 옮기기로 하였다. 새로운 방벽은 142년 이후 세워졌다. 이 방벽은 한 세대 동안 사용되다가 160년대에 방치되었다. 158년 이후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안토니누스 황제는 게르마니아에 안토니누스 방벽과 유사한 국경을 설치하라고 명령하였다. 두 방벽 모두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고 방어선을 단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방벽이 존재한 20년 동안 높은 석조 기반의 흙벽, 일련의 요새와 작은 요새를 건축하였다. 안토니누스 방벽은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만들어냈다. 이 방벽의 주된 역할은 북부의 부족들이 브리타니아 지방을 침략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방지하고, 로마의 다른 국경선과 마찬가지로 제국 외부 사람들과 경제적·사회적 관계를 향상하는 것이었다. 특정 장소에서는 지방으로 출입하는 교통을 통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안토니누스 방벽은 로마 제국이 지은 마지막 선형 장벽이다. 이 방벽을 포기한 뒤 로마 군대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북부의 몇몇 지역을 지속적으로 점령하였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방벽에 위치한 곳은 점령하지 못하였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193?211)는 이 지역을 다시 점령하려고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으나, 정벌 도중 사망함으로써 영원히 이 목표를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로마 제국은 3세기 중반에 힘을 잃었으나 이후 다시금 강대해져 5세기 하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 방벽은 160년에 로마 군대가 방치한 뒤 나무로 된 부분부터 자연적으로 파손되기 시작해서 급속도로 손상되었다. 석재로 지은 요새에서는 지역민들이 석재를 가져다 사용하였으며, 벽과 해자도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요새의 많은 부분에서 석재를 가져다 농가나 다른 건물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또한 농업 혁명으로 집중 경작이 이루어짐으로써 흙으로 된 유적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19세기에는 석탄 채굴이 활발해져 등재된 유적과 완충 지역에 손상을 입혔다. 산업 활동으로 이 지역 인구가 상당히 증가하였고, 많은 정착민이 방벽에 가까운 지역이나 그 너머에까지 주거지를 확대했다. 예외적으로 방벽이 캘런더(Callendar) 가문이나 밴타스킨(Bantaskine) 가문 등의 영지를 지나는 경우에는 손상이 적었다. 건설은 지속되었고, 1960년대에 지은 주택들은 비어스덴(Bearsden) 요새와 캐슬힐(Castlehill) 요새 사이의 영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석장 활동이 증가하면서 방벽이 손상되었고, 캐더(Cadder)의 전체 성채는 발굴되어 사라졌다. 안토니누스 방벽은 영국의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베다(Venerable Bede, 730년경)가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나, 그가 실제로 이 방벽을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안토니누스 방벽이 처음으로 표현된 것은 13세기에 매튜 패리스(Matthew Paris)가 그린 영국 지도이다. 1755년에 윌리엄 로이(William Roy)는 방벽의 군사로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그렸다. 안토니누스 방벽에 관해서는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걸쳐 언급되었으며, 이 방벽의 옛 지명인 그리미스디케(Grymisdyke)와 그라함스디케(Grahamsdyke)는 21세기까지 유지되었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가 방벽을 건설할 당시 총독인 롤리우스 우르비쿠스(Lollius Urbicus)의 최초 비문이 1699년에 발견되었는데, 이는 토목 공사의 기원에 대한 실마리를 제시하였다. 이 방벽에 대한 최초의 상세한 묘사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고고학적 조사는 19세기에 시작되었다. 안토니누스 방벽에 대해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간행물은 조지 맥도널드(George Macdonald)가 20세기 전반에 쓴 논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중 고고학을 이용한 집중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새로운 논문집과 논문으로 기록되었다.
출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갤러리
http://www.unesco.or.kr/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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