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역사 지구 / Historic Quarter of the City of Colonia del Sacramento
- 국가명
- 우루과이
- 등재연도
- 1995
- 등재기준
-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16㏊
- 위치
- 콜로니아 주(Department de Colonia)
- 좌표
- S34 28 4 W57 51 12
- 간략개요
- 1680년 포르투갈 인들이 리우데라플라타(Rio de la Plata) 유역에 세운 이 도시는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한 세기에 걸친 에스파냐와의 분쟁 끝에 마침내 포르투갈 인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도시의 경관은 잘 보존되어 포르투갈, 에스파냐, 탈식민지 양식들의 성공적인 융합을 보여 준다.
- 정당성/가치
-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 역사 지구의 건축물과 공간 배치는 17세기 말 유럽 식민지의 성격과 목적을 드러내는 훌륭한 증거이다. 포르투갈의 섭정관이었던 동 페드루(Dom Pedro)는 1678년에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 총독이자 지사(知事, chief minister)였던 마누엘 로보(Manuel Lobo)로 하여금 세인트 가브리엘(St Gabriel) 섬의 리우데라플라타(Rio de la Plata) 유역에 식민 거주지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작업은 1680년에 시작되었으며, 1690년에는 마스터 교회(Master Church)와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이 지어졌다.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1704~1705) 동안 사크라멘토는 점령당해 산산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재건축이 시작되어 1718년에는 1,000명 이상이 이 도시에 거주하게 되었다. 1722년에 안토니오 페드로 데 바스콘첼로스(Antonio Pedro de Vasconcellos)가 총독이 되면서 사크라멘토는 식민지의 물질적·상업적·문화적 발전 동력소가 되었다. 또한 상업적 수출 입항지로 번영을 이루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인근 지역의 발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사크라멘토는 1762년에 다시 에스파냐에 점령당하지만, 이듬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사이에 체결된 조약을 통해 다시 포르투갈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1777년 에스파냐에 의해 포위당한 후,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조약을 통해 명확하게 에스파냐 제국에 귀속된다. 당시 요새와 가옥들 일부가 파괴되긴 했으나, 도시의 기반 시설 대부분은 온전히 보존되었다. 1839년~1851년에는 신생국 우루과이가 이웃 나라 아르헨티나와 소위 ‘대전쟁(Great War)’을 치렀다. 결국 도시에 남아 있던 방어 시설은 1859년에 전부 파괴되었고, 수도 몬테비데오(Montevideo)도 큰 영향을 받았다. 사크라멘토의 역사적 중요성은 1924년에 최초로 인식되는데, 당시 이곳의 일부를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포르투갈의 옛 도시 노바 콜로니아 도 산티시모 사크라멘토(Nova Colonia do Santissimo Sacramento)는 반도의 극서쪽 리우데라플라타 인근에 건설되었다. 도시는 북쪽, 서쪽, 남쪽이 해양으로 둘러싸여 있고, 도시 동쪽에는 예전의 방어벽과 요새들이 줄지어 있다. 오늘날 역사 지구는 칼레 이투사잉구(Calle Ituzaingo)를 축으로 하여 뚜렷하게 경계 지어진다. 건물들은 시대와 양식을 폭넓게 아우르며, 도시는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공간 배치와 3세기 이상 이어진 포르투갈, 에스파냐, 우루과이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다수의 뚜렷한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자연 지형에 잘 적응되어 도시는 자연스러운 형태를 보인다. 이곳은 식민지 건축 양식의 발달에 의심할 여지없는 영향을 끼쳤다. 포르투갈의 많은 건축가가 과거 포르투갈의 영토였던 이곳에서 일했기 때문에, 오늘날 라플라타 강 양 기슭에는 포르투갈로부터 영향 받은 건물들이 남아 있다. 이 도시의 건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페루 광산의 부와 브라질 과일과 농업 지역을 놓고 서로 다툰 남아메리카의 두 식민 강대국,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주장들이 지연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