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토커이 와인 역사 문화 경관 / Tokaj Wine Region Historic Cultural Landscape
- 국가명
- 헝가리
- 등재연도
- 2002
- 등재기준
- (iii) (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13,255㏊
- 위치
- 보르쇼드 어버우이 젬플렌 주(County of Borsod-Abauj-Zemplen)
- 좌표
- N48 8 60 E21 21 0
- 간략개요
- 토커이(Tokaj)의 문화 경관은 낮은 산과 계곡에서 행해진 와인 생산의 오랜 전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와인 저장소들과 관련된 역사적 연결망(networks)과 함께 포도밭·농장·마을·소도시들이 복잡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형태는 토커이 와인의 전체 생산 과정을 설명한다. 이곳 와인의 품질과 관리는 약 3세기 동안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 정당성/가치
- 토커이 와인 지역의 전체 경관은 포도밭과 오래 전부터 생활해 오던 정착지를 포함할 뿐 아니라 전통적인 경작지의 전문화된 모습과 1,000년의 전통적인 포도 재배 방식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곳은 오늘날에도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토커이 지역에 인간이 꾸준히 정착·거주했음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징후들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 말에 토커이 와인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한 마자르족은 이 지역이 훈족 아틸라 제국의 중심이라고 믿었으며, 이곳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은 자신들과 훈족이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은 잇따른 몽골족과 여러 나라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피난민들을 보호했으며, 폴란드 상인들이 발칸 반도와 다른 지역으로까지 교역하는 데 중요한 상업 교차로의 역할을 했다. 12세기부터 헝가리 왕들이 이끌고 온 왈론 사람들과 이탈리아 이주민들이 이곳에 정착했고, 헝가리 왕국이 출현하면서 게르만족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16세기경에 잠시 보헤미아 후스파(Hussites de Boheme)의 통치를 받았지만, 헝가리의 마지막 위대한 왕인 후냐디 마차슈(Hunyadi Matyas, 마티아스 코르비누스)에 의해 헝가리 왕국과 다시 통합되었다. 토커이 지역은 헝가리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나, 적의 기습에 자주 노출되어 있는 위험한 국경 지대였다. 토커이 지역에서 포도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였다. 포도 농사는 동쪽에서 전해졌다고 추정되며, 9세기∼10세기에 헝가리인들과 함께 카르파트(Carpate) 지역에 정착했던 카바르족이 포도 농사를 전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토커이 아슈(Tokaji Aszu)’가 처음 생산된 것은 오스만튀르크 제국 시대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터키의 침략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로란트피 미헐리(Lorantffy Mihaly) 소유지에서 포도 수확 시기를 놓치면서 포도에 주름이 생기는 귀부병(貴腐病, noble rot)에 포도가 감염되었고, 라 보르트리티스 시레네아(La Bortrytis Cirenea)가 정착하면서 푸리튀르 노블(pourriture noble, 귀부병 와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수도원 원장이던 마테 셉쉬 라즈코(Mate Szepsi Laczko)도 귀부병에 감염된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군주의 딸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토커이 와인은 17세기 초에 권력을 잡은 라코치(Rakoczi) 트란실바니아 왕조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페렌크 라코치 2세(Ferenc Ⅱ Rakoczi)가 주도한 헝가리 독립을 위한 전쟁에서, 그는 루이 14세(Louis ⅩⅣ)와 같은 유럽 군주들에게 토커이 와인을 선물했다. 그러면서 토커이 와인은 널리 명성을 떨쳤다. 1717년 페렌크 라코치 2세가 패배하고 유배당하자, 합스부르크(Habsbourg) 가(家)는 그의 소유지를 다시 인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 토커이 지역은 와인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며 번창했다. 1870년 이 지역의 언덕 기슭에는 인구가 밀집했으며, 가장 발전했던 프랑스나 독일 연방의 인구수보다 많았다. 이웃한 슬로바키아·루테니아·그리스·마케도니아에서 온 이주민들이 토커이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 온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대부분 와인 도매상이었다. 18세기 말부터 점차적으로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와인 도매상으로 활동했으며, 유대인들은 토커이 와인 상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토커이 와인은 19세기에 시장이 축소되면서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했다. 포도나무뿌리진병에 걸려 죽은 토커이의 포도나무들이 거의 잘려 나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토커이 포도 농사는 최악이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e, 유대인 대학살)로 유대인들이 죽었고,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사유 재산이 폐지되면서 이 지역의 성공을 이끌던 동력이 갑자기 사라졌던 것이다. 헝가리는 1990년에 정치적 변화를 맞이하면서 토커이 와인 생산과 포도 농사의 재건에 착수했다. 토커이 지역의 온화한 기후는 토양의 품질을 좋게 해주었고, 경사면은 포도 경작을 하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다. 토커이 와인 지역의 형성과 정착 단계는 지역의 수로학과 지형학을 감안한 것이다. 정착지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보드로크(Bodrog) 강이고 다른 하나는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헤르나드(Hernad) 강과 세렌스(Szerencs) 하천 유역이다. 보드로크 강은 젬플렌(Zemplen) 산의 산자락에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이 강의 오른쪽 제방을 따라 정착지들이 늘어서 있다. 다른 정착지는 보드로크 강으로 흐르는 개울의 계곡 부근에 있는데, 이곳은 예전에 주요 강의 교차점이었던 토커이의 티서(Tisza) 강과 합류한다. 세렌스 하천은 탁타(Takta) 지역으로 넓게 트여 있으며, 양쪽 제방으로 정착지가 펼쳐 있다. 토커이의 이름은 10세기 이래 헝가리 언어로 쓰이기 시작한 아르메니아의 단어 ‘포도(grape)’에서 유래했는데, 이를 통해 정착지가 언제쯤 생겼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지역명은 당시에 포도 재배가 이미 행해졌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그 지역의 건축 유산은 역사와 사회적 ? 경제적 구조물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데, 각각의 정착지에서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와 18세기∼19세기의 그리스정교회 교회, 유대인의 유대교 회당, 귀족의 성과 대저택, 허름한 집, 와인 가게, 작업장 등이 발견되었다. 초기 정착지의 증거로는 12세기 보드로걸시(Bodrogalszi) 지역의 로마네스크식 교회(완충지역 내에 있음)를 들 수 있다. 완충지역에는 폐허가 된 토커이의 14세기 성들과 지정 구역의 탈야(Tallya), 모노크(Monok), 사로스파탁(Sarospatak), 세렌스(Szerencs)가 있다. 18세기, 19세기부터 귀족의 대저택이 타르칼(Tarcal)과 완충지역 안에서 발견되었다. 토커이 지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와인 저장고를 꼽을 수 있는데, 타르칼의 칼만(Kalman) 왕 시대인 1110년에도 와인 저장고가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커이의 저장고는 둥근 천장과 땅에 굴을 판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기본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먼저 건물 아래에 빈 공간이 있으며, 집을 건설하기 전에 미리 굴을 파서 현관 가까이에 저장고가 위치하도록 설계하였다. 포도는 집 뒤편의 공간에서 가공 과정을 거치게 된다. 굴로 된 저장고는 주거 건물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외관상으로는 격자 창살이나 나무문이 있는 암석 출입구가 보일 뿐이다. 응회암을 깎아 만든 저장고는 둥근 천장으로 보강할 필요가 없었으며, 토커이 지역의 저장고들 중에 80%∼85%는 이런 방식으로 건설되어 있다. 특별히 흥미로운 점은 비체계적인 평면도로 설계된 미로 같은 다층 저장고이다. 이곳에서 와인은 졸참나무로 만든 큰 통에서 숙성·저장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샤토럴려우이헤이(Satoraljaujhely)의 언버리(Ungvari)에 있는 저장고의 연결망으로, 각 구역별로 27개 이상의 저장통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