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유산명)
- 미스트라스의 고고 유적 / Archaeological Site of Mystras
- 국가명
- 그리스
- 등재연도
- 1989
- 등재기준
- (ii) (iii) (iv)
- 분류
- 문화
- 유산면적
- 54㏊
- 위치
- 펠로폰네소스 반도(Region of the Peloponnesos) 라코니아 주(Prefecture of Laconia)
- 좌표
- N37 4 50.016 E22 22 0.012
- 간략개요
- ‘모레아(Morea)의 경이(驚異)’라는 뜻을 가진 미스트라스는 1249년에 아카이아(Achaia)의 군주 기욤 드 빌라르두앵(Guillaume de Villehardouin, 발라르두앵의 윌리엄 2세)이 건설한 요새의 주위에 원형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비잔틴에 의해 재정복되었다가 터키인과 베네치아 인의 차지가 된 도시는 1832년 이후 버려졌으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자리 잡은 숨막힐 듯한 중세 유적은 잘 보존되어 있다.
- 정당성/가치
- 사람에 의해 버려졌고 식물들이 성벽을 쪼개고 언덕 기슭을 뒤덮으며 잠식하여 역사의 연약한 흔적들을 여기 저기 파괴하고 있지만, 미스트라스의 유적 단지는 화려한 운명을 간직한 도시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미스트라스는 1248년~1249년에 아카이아의 군주이자 프랑크의 제후였던 기욤 드 빌라르두앵이 스파르타를 내려다보는 620m 높이의 언덕 위에 커다란 성을 세우기로 하면서 탄생했다. 이 성은 비잔틴 제국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었으며, 또한 타이게토스 산(Taygete)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 멜링게스(Melinges) 인과 레제리테(Lezerite) 인을 가리키는 에스클라본(Esclavon) 인들을 견제할 수 있었다. 폐허가 된 뒤에도 성 안에는 소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1832년에 오토 1세가 새로운 도시 스파르타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는 버려지게 되었다. 미스트라스는 거의 6세기 동안 불안한 존립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몇 차례 여러 왕조의 지배 아래 정치적·문화적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기욤 드 빌라르두앵이 이 도시를 건설할 때도 역사의 소용돌이는 비껴가지 않았다. 성이 막 완성되었을 즈음에 기욤 2세는 펠라고니아(Pelagonia) 전투에서 비잔틴 팔라이올로고스(Palaeologus) 왕조의 미카일(Michael) 8세에게 패하여 포로 신세가 되는 바람에 기욤 2세는 모넴바시아(Monemvasia)· 마니아(Mania)·미스트라스 등 3개의 요새를 미카일 8세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1261~1262). 1265년 승리의 여신이 다시 일시적으로 기욤 2세에게 빛을 비추었을 때, 그는 스파르타 주민들이 취약한 그들의 도시를 버리고 미스트라스 성 주변에 피난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262년~1348년까지 미스트라스는 많은 전쟁에서 전리품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1년 단위로, 1308년부터는 영구적으로 비잔틴의 군사령관이자 총독이 이곳에 부임했다. 스파르타의 주교구도 이 새로운 도시로 이전했고, 1264년에는 성 데메트리오스(St Demetrios)에게 바치는 메트로폴리스가 건설된 뒤 1310년 이후에 재건되었다. 또 성 테오도레 수녀원(Theodore Saints, 196년 이전), 브론토키온 수녀원(Brontochion, 1310년경) 등도 화려한 장식과 함께 건설되었다. 1348년~1460년 사이에 미스트라스는 모레아 공국(Despotate of Morea)의 수도가 되었다. 이 공국은 봉건 체제를 바탕으로 왕가의 권력을 가족―아들과 형제들에게 이양한 칸타쿠제노스 왕조(Cantakouzenos, Cantacuzene, 1348~1384)와 팔라이올로고스 왕조(Paleologi, Palaeologos, 1384~1460)의 탈중앙 집권화에 대한 욕망의 소산이었다. 미스트라스의 최전성기였던 이 기간에 페리블렙토스(Peribleptos) 성당(1350)과 판타나사(Pantanassa) 수도원(1428경)이 세워졌고, 이 국제적인 도시는 지중해 지역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프랑크 왕국의 공주들과 결혼했고, 터키 인(오스만 제국)이나 베네치아와 불가피한 동맹을 맺기도 했다. 1402년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테오도레 1세(Theodore I Paleologus, 재위 1382~1407)는 미스트라스를 로데스(Rhodes)의 기사단에 팔았으나, 주민들이 반발함으로써 그 거래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1446년의 원정에서 승리한 무라드(Murad) 2세에게 조공을 바친 후, 미스트라스는 1460년 5월 30일 무하메드(Mohammed) 2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사건은 동서양의 역사에서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비견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왕조의 부흥기에 그려진 극적인 프레스코화로 뒤덮인 미스트라스 교회들의 아름다움, 이곳 도서관의 명성, 그리고 신플라톤주의적 인문주의를 이탈리아로 전해 준 게오르게스 게미스테 플레톤(Georges Gemiste Plethon), 바실리오스 베사리온(Basilios Bessarion) 등과 미스트라스 작가들의 영광은 그 후 ‘모레아의 경이’로 실체화되었다. 미스트라스는 16세기에 터키인에게 점령되었다가, 1669년에는 베네치아에게 일시적으로 정복된 뒤 1687년~1715년까지 지배를 받았으며, 이어서 1715년에는 다시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다, 미스트라스는 여전히 약 40,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그 도시의 제조와 무역에 유일한 원천은 견직물 산업뿐이었다. 1770년의 대반란(Magna Revolt) 때 미스트라스는 알바니아인들에 의해 화재를 입었으며, 아예 폐기되는 바람에 결국 폐허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