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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재자료

청계사 (淸溪寺)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수량/면적 19168
지정(등록)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도 의왕시 청계로 475 (청계동, 청계사)
소유자(소유단체) 청계사 
관리자(관리단체) 청계사 
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경기도 의왕시 문화체육과 031-345-2534
안내판 설명
종합안내판

청계사 淸溪寺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호 청계산(淸溪山)은 민족(民族)의 영산(靈山)으로서 산 곳곳에 상서로움이 일고 법신을 빚어내는 정기가 있으니 이곳이 하늘이 숨겨 놓은 영부(靈府)이다. 청계사(淸溪寺)는 신라 말에 창건된 유서깊은 가람으로 제불(諸佛)보살이 중생의 비원(悲願)에 따라 머물던 옛 부처의 도량이다. 여기서 우리 조상(祖上)들은 생멸의 슬픔을 뛰어넘는 무생(無生)의 지혜를 닦아 천지(天地)와 더불어 한 몸이 되었고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었다. 고려 1284년(충렬왕 10년) 불심이 돈독한 조인규(趙人規) 거사(居士)의 원력에 의해 중창(重創)되어 원찰을 삼았고, 이 때 사세가 확장되고, 금자 법화경 사경과 많은 불화(佛畵)가 제작되어 봉안되었으며, 1880년 음곡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조사의 혜맥을 전승한 근대 선종의 중흥조인 경허 선사가 출가 득도하여 이 땅에 꺼져가는 혜등을 밝혔고, 만공 선사가 주석하여 선종의 지평을 넓혔다. 누구나 절 밖에서 절 안으로 들어오면, 마음은 깨침의 세계를 열게 하여 진리의 원천에 돌아가게 하는, 부처님의 지혜와 가피가 충만한 곳이다. 누구나 이 곳에서 원과 뜻을 세우면 한결같이 진미(眞味)를 맛보고 실리(實利)를 거두어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니, 이 모두 청계사(淸溪寺)가 지닌 건곤(乾坤)의 덕화(德化) 때문이다. 극락보전에 봉안된 주불(主佛)과 관세음보살은 신통자재한 신령함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지난 2000년 10월 6일 관세음보살 얼굴에는 삼천 년마다 한 번 피는 우담발화가 스물한 송이나 피었으니 이것은 관세음보살이 우리 곁에 현신함이요, 민족의 성지임을 깨닫게 한 길상(吉祥)이기도 하다.

문화재 설명

청계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하였으며 고려 충렬왕 10년(1284)에 평양부원군 조인규가 자신의 원당(願堂)으로 크게 다시 짓고 청계사 내에 자신을 위한 건물을 만들어 머물기도 하였다.



조선 세조 13년(1431)과 세조 30년(1448)에 조인규의 6세손인 조현(趙玹)이 다시 짓는 등 오랫동안 청계사는 조인규 집안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연산군 9년(1503) 도성 내 사찰 폐쇄령이 떨어지게 되자 청계사는 봉은사를 대신해 선종본찰(禪宗本刹)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임진왜란과 화재의 피해를 받았다. 조선 숙종 15년(1689) 승려 성희(性熙)가 다시 사찰을 크게 짓고, 그 내력을 추려 청계사사적기비를 세웠다. 영조 37년(1761) 왕세손 정조가 직접 청계사를 찾아 왕실을 위한 기도처를 마련하고, 밤나무 3,000주(柱)를 내리고 관리하게 하였다. 정조 13년(1789)에는 현륭원제각(顯隆園祭閣)을 세웠다. 이후 정조 22년(1798)에 조인규 후손인 조무의(趙武毅)의 시주로 불사가 이루어졌다. 그 뒤에도 조선후기를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진 불사를 통해 청계사는 안정적으로 가람(伽藍)의 형태를 이어올 수 있었다. 특히 19세기에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을 일으켰던 경허(鏡虛, 1849~1912)가 이곳에서 출가하여 도를 깨우쳤고, 그 선맥을 이은 만공(滿空, 1871~1946), 금오(金烏, 1896~1968), 월산(月山, 1912~1997) 등이 이곳에서 공부하였다.



사찰 건물은 조선후기의 건물로 추정되는 극락보전과 종각 및 삼성각, 지장전, 수각 등 3동의 요사를 비롯해 10채의 건물이 있으며 감로지 등이 자리 잡고 있다.

Cheonggyesa Temple was founded in the Silla era, and during the 10th year of King Chungyeol in the Goryeo Dynasty(1284), Cho Ingyu, The Prince of the Court from Pyeongyang, rebuilt it largely as his own prayer chapel and made a building for himself in Cheonggyesa Temple. In the 13th year of King Sejo's reign(1431) and the 30th year King Sejo's reign(1448) in the Joseon Dynasty, Cho Hyeon, sixth-generation descendant of Cho Ingyu, rebuilt it, Cheonggyesa Temple has long been an prayer chapel of Cho Ingyu's family. When the closure of the temple was ordered within the capital city in the ninth year of Yeonsangun reign(1503), Cheonggyesa Temple played a role as spearhead temple on behalf of Bongeunsa Temple, but was damaged by the Japanes Invasion of Korea and fire. In the 15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1689), the monk Seonghee built a large temple again and erected the Cheonggyesa Temple's historical monument. In the 37th year of King Yeongjo's reign(1761), Jeongjo, the eldest grandson of the king, personally visited Cheonggyesa Temple to prepare a prayer place for the royal family, and planted 3,000 chestnut trees to manage it. Hyeollungwon Shrine(顯隆園祭閣) was built in the 13th year of King Jeongjo(1789). Later, the Buddhist ceremony was practiced by offering of Cho Muui(趙武毅), descendant of Cho Ingyu in the 22nd year of King Jeongjo's reign(1798). Afterwards, Cheonggyesa Temple was able to stably follow the form of monastery through the Buddhist ceremony that was carried out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to the Japanese occupation. In the 19th century, Gyeongheo(鏡虛, 1849-1912), who caused the great rise of Zen Buddhism in Korea, was born here to enter the Buddhist priesthood, and Mangong(滿空, 1871-1946), Geumoh(金烏, 1896-1968), Wolsan(月山, 1912-1997) and others studied there. The Cheonggyesa temple has 10 buildings, including the main Buddhist temples of Geungnak Bojeon Hall and Belfry, Samseonggak, Jijangjeon Hall, Pavilion on the Water, and the Gamnoji Well, which is believed to be the buildings of the late Joseon Dynasty.

清溪寺始建于新罗时期,高丽忠烈王10年(1284),平壤府院君赵仁圭当做自己的願堂扩大重建,还在寺内专门为自己建造了建筑并停留。朝鲜世祖13年(1431)和世祖30年(1448),赵仁圭的六世孙赵玹又重建。长期以来,清溪寺成为赵仁圭家族的願刹。燕山君9年(1503),都城内下达寺庙封锁令时,清溪寺虽代替奉恩寺履行了禅宗本刹的职责,却遭受了壬辰倭乱和火灾之灾。朝鲜肃宗15年(1689),僧侣性熙扩大重建,并整理其来历,立了“清溪寺事迹记碑”。英祖37年(1761),王世孙正祖亲自到清溪寺,为王室准备祈祷处,赐予三千棵栗树,使其管理。正祖13年(1789)修建了显隆园祭閣。之后,正祖22年赵仁圭的后孙赵武毅施主举行了佛事。此后,从朝鲜后期直到日本帝国主义强占时期,通过持续的佛事,清溪寺才能够稳定地延续了伽蓝的形态。特别是19世纪,引起韩国禅宗中兴的镜虚(1849-1912)在此出家悟道,而且继承此禅脉的满空(1871-1948)、金乌(1896-1968)、月山(1912-1997)等人也在此学习。寺庙的建筑包括推定为朝鲜后期的建筑—极乐宝典、钟阁及三成阁、地臧阁、水阁等三栋窑舍在内,共有10栋建筑,另外还有甘露地等。

清渓寺(チョンゲサ)は新羅時代創建され、1284年(高麗忠烈王10年)平壌府院君の趙仁規が個人の願堂として改築した。 清渓寺の中に個人用の建物を建てて泊まったこともあった。1431年(朝鮮世祖13年)と1448年(世祖30年)に趙仁規の6代孫の趙玹が新たに建て直すなど、清渓寺は長い間趙仁規の家の寺院として愛護されていた。 1503年(燕山君9年)都城内の寺刹閉鎖令が下されることになると、清渓寺は奉恩寺の代わりに禅宗本刹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たが、壬辰倭乱と火事による被害を受けた。1689年(粛宗15年)僧侶性熙が大きく再築し、その来歴をまとめ、清渓寺事蹟記碑を立てた。1761年(英祖37年)王太孫の正祖が直接清渓寺を訪ね、王室用の祈願所を設けた後、栗木3千本を授け、管理させた。1789年(正祖13年)には顕隆園祭閣を建てた。以後、1798年(正祖22年)趙仁規の子孫である趙武毅の施主で仏事が行われた。その後も朝鮮後期から日本占領期に至るまで行われてきた仏事を通じて清渓寺は安定的に伽藍の形態を受け継いでこられた。特に19世紀には韓国禅宗を中興した僧侶鏡虚(1849∼1912)がここで出家し、道を悟って、その禅を受け継いだ満空(1871∼1946)、金烏(1896∼1968)、月山(1912∼1997)などがここで勉強した。 寺の建物は朝鮮後期のものと推定される極楽寶殿と鐘閣及び三聖閣、地蔵殿、水閣など3棟の寮舎をはじめ、10棟の建物以外にも甘露池などが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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