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안내판
수원 화성행궁
水原 華城行宮
1796년(정조 20) 창건
2002년 복원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조선 정조 13년(1789)에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 읍치 자리로 옮기고, 원래 수원부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겨 오면서 관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11년부터 일제에 의해 병원(자혜의원)과 경찰서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건물이 파괴되어, 현재는 낙남헌과 노래당만 본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1996년부터 발굴조사 자료와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 사업을 시작해 2002년에 중심권역의 복원 공사를 마쳤다. 2016년부터 화성행궁 우화관과 별주의 발굴조사와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개별안내판
신풍루
新豐樓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읍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신풍루는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인 풍패(豐沛)에서 따온 이름으로 제왕의 고향 풍패지향(豐沛之鄕)으로서 화성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정조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풍루에서 수원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를 베풀었는데, 당시의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행랑: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
개별안내판
봉수당
奉壽堂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봉수당은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건물은 정면 7칸으로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를 갖추었다. 어로와 월대는 일반 동헌에는 없고 임금이 머무는 공간에만 설치하는 시설이다. 1795년 윤 2월 13일,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리던 날 봉수당 월대 앞에 넓은 무대를 설치하고 궁중연희가 펼쳐졌다. 당시 행사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월대: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개별안내판
장락당
長樂堂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장락당은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열면서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중국 한나라의 고조가 어머니를 위해 장락궁을 지은 것을 본받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장락당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다. 장락당과 봉수당은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장락당은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건물은 전체 13칸 규모이며, 삼면에 툇간*을 두어 통행에 편하도록 했다. 온돌방은 매 칸마다 겹겹이 문을 달아 아늑하게 만들었고, 문을 모두 열어젖히면 실내가 트이도록 했다. 정조는 장락당과 복내당 사이의 담장에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라는 두 개의 문을 내었는데, 이를 통해 어머니의 복을 기원하는 정조의 효심을 확인할 수 있다.
*툇간: 집채의 안둘레간 밖에 따로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
개별안내판
경룡관
景龍館
1794년(정조 18) 창건
1997년 복원
경룡관은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대문 상부에 지은 다락집이다. 당나라 태종 때 열여덟 명의 학사들이 임금의 시에 화답한 것을 본떠서 정조가 직접 이름을 지었다. 경룡관은 당 태종의 궁전 이름이기도 하다. 아래층 대문 이름은 지락문(至樂門)이다. 이는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으로 장락당으로 들어가는 것이 즐겁다는 의미이다. 문의 규모는 작으나 네모난 돌기둥 네 개를 우뚝 세워 위엄을 높였다.
개별안내판
복내당
福內堂
1789년(정조 13) 창건
1997년 복원
복내당은 수원읍 고을 수령과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정조가 건물의 이름을 직접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써서 내렸는데, 복내(福內)란 ‘모든 일이 밖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면 복이 안에서 생겨난다’는 뜻이다.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복내당은 처음에는 역ㄱ자 모양의 작은 건물이었으나 1794년에 북쪽으로 온돌방 4칸 반을 추가하면서 ㄷ자 모양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으로 서별당이 들어서고, 동남쪽으로도 행각이 늘어나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20세기 초 경기도립병원이 들어서면서 철거되어 화성행궁을 복원할 때 다시 지었다.
개별안내판
낙남헌
落南軒
1794년(정조 18) 창건
낙남헌은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중국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부하들 덕분에 나라를 세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이야기를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정조는 1795년 을묘원행 당시 낙남헌에서 수원의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무과 시험을 치르고 상을 내리는 등 다양한 행사를 열었다.
낙남헌 건물은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다. 연회를 베푸는 건물답게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다.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 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낙남헌은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건물로 원형이 잘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신풍국민학교 교무실로도 사용되었다.
*월대: 궁궐의 정전, 묘단, 향교 등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개별안내판
득중정
得中亭
득중정은 활을 쏘는 정자로서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었다.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는 구절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본래 낙남헌 터에 있었으며 정조가 글씨를 쓴 현판이 걸려 있었다. 1794년에 건물을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임금이 활을 쏘는 어사대를 특별히 마련했다. 정조는 수원에 올 때면 득중정에서 활을 쏘았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신하들과 활을 쏘고 매화포를 구경한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개별안내판
미로한정
未老閒亭
미로한정은 화성행궁 후원에 세운 소박한 정자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팔달산 아래로 이전한 이후에 지었다. 처음 이름은 육면정(六面亭)이었으나 1795년에 미로한정(未老閑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는 '늙기 전에 한가로움을 얻어야 진정한 한가로움이다(未老得閑方是閑'라는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에 내려와 한가하게 노년을 즐기고자 했던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화성 축성을 막 시작한 1794년 정월, 정조는 미로한정에 올라가 허허벌판이던 수원부에 1천여 집이 들어서 번성한 모습을 바라보며 관리들을 칭찬했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에 활약한 화가 김홍도는 미로 한정 주변에 가을 국화가 가득한 모습을 ‘한정품국(閒亭品菊)' 이라는 그림으로 남겼다.
개별안내판
내포사
內鋪舍
1796년(정조 20) 창건
2006년 복원
내포사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행궁에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하던 군사 시설이다. 화성행궁 후원에서 높고 탁 트인 곳에 있어서 사방을 관찰하기에 적절하다. 평상시에는 장교 1인과 군졸 3인이 근무하였지만 왕이 행궁에 머물면 장교 2인과 군졸 4인을 배치해 경비를 강화했다. 전면 반 칸은 개방하고 좌우에 낮은 벽을 쳐서 비바람을 막았으며, 군사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후면 1칸에는 온돌을 설치했다.
개별안내판
외정리소
外整理所
1796년(정조 20) 창건
2000년 복원
외정리소는 화성에서 거행되는 국왕의 행차나 행사에 드는 모든 비용 문제를 총괄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19년(1795)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에서 치를 때 행사준비를 담당하기 위해 임시기관으로 만들었다. 화성 성역이 끝난 후에는 행사준비뿐 아니라 화성행궁의 수리, 군사들의 식량과 말 먹이까지 관장하였다. 1796년에 유여택 동쪽의 빈의문 밖에 건물을 짓고, 대문에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걸었다. 마루로 된 대청 6칸을 중심으로 주위에 행랑과 창고를 두었다.
개별안내판
집사청
執事廳
1790년(정조 14) 창건
2002년 복원
집사청은 관청에서 치르는 제사나 행사를 준비하는 집사들이 근무하는 건물로 조선 정조 14년(1790)에 건립되었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를 비롯해서 왕이 화성에 내려와 진행하는 모든 행사를 준비했다. 평소에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화성행궁의 객사*인 우화관에서 올릴 의례를 준비하는 곳으로 쓰였다. 집사청은 우화관 가까이에 있어 효율성을 고려하여 배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객사: 조선 시대에 왕의 위패를 봉안하고 공식 행사를 하던 곳
개별안내판
비장청
裨將廳
1789년(정조 13) 창건
2002년 복원
비장청은 고을 수령을 보좌하는 비장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화성 유수는 정2품 당상관이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비장을 두었다. 조선 정조 19년(1795)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를 때 비장은 음식을 차리는 일을 비롯해서 행사의 모든 절차를 담당했다. 비장청은 유수를 보좌하는 업무 성격에 맞게 고을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는 건물인 동헌(봉수당) 가까이에 두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던 1796년에 서리청의 건물을 수리해서 비장청으로 사용하였다.
개별안내판
서리청
書吏廳
1796년(정조 20) 창건
2002년 복원
서리청은 화성유수부 관청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들이 근무하는 건물이다. 조선 정조 13년(1789) 수원읍을 옮길 당시에는 장남헌 동쪽에 서리청을 지었다. 화성 축성이 마무리되면서 서리청의 건물을 비장청으로 사용하고, 그 동쪽에 있던 금도청*을 고쳐서 서리청으로 사용했다. 행궁 안의 건물들이 보통 10칸 내외 규모인데 비해 서리청은 22칸에 달한다. 서리청 마당 건너 남쪽에는 문서창고가 있다.
*금도청(禁盜廳): 도적이나 법을 어긴 자들을 잡는 군사들이 머무는 건물
개별안내판
남군영
南軍營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좌우에 남군영과 북군영 건물을 짓고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봄, 가을로 두 번 시험을 치러서 수석을 차지한 군사에게는 곧바로 관직을 높여 주는 등 특별한 혜택을 주었다.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정조의 친위군사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