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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 (烏山 禿山城과 洗馬臺址)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면적 75,254㎡
지정(등록)일 1964.08.29
소 재 지 경기 오산시 지곶동 162-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오산시 
문화재 담당부서 : 보존정책과- 상세문의
안내판 설명
종합안내판

독성산성(秃城山城)이라고도 하는 이 산성은,평지에서 돌출하여 사방을 두루살필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과 용인의 석성산성 등과 함게 도성방어를 위한 삼각체계를 형성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성은 백제가 처음 쌓고,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임진왜란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27년9월11일부터 14일까지 불과4일만에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벽을 새로 쌓았다고 한다.이곳에 있는 세마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선조25년(1592)12월에 전라도 관찰사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勤王兵)2만을 모집하여 북상하다가 이성에서 진을치고 있었다. 그때 가토(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수만명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별거숭이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지게를 산위로 올려 보내 조롱하였다. 그러자 권율은 물이 풍부한 것처럼 보이기 위하여 백마(白馬)를 산 위로 끌고가 흰쌀을 말에 끼얹으며 목욕시키는 시늉을 하였다. 이를 본 왜군은 산꼭대기에서 말 씻길 정도로 물이 풍부하다고 오판하고 퇴각 하였다고 한다 이때 말을 씻었던 높은 대를 세마대(洗馬臺)라 한다.

개별안내판

보적사 寶積寺 보적사는 독산성 동문 안에 있는 사찰로 지어진 때를 알 수 있는 옛 문헌이나 유물은 없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고쳐 지어졌고, 용주사를 세울 당시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과 요사(寮舍)1) 3동이 다시 지어졌다고 한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에 따르면 보적사는 21칸 반 규모였다고 한다. 이후 1902년 약사전을 허물고 새로 지었으며, 1987년에 고쳐 지으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는 석가여래와 약사여래,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과 요사 2동과 3층 석탑이 있다. 보적사는 1978년 세마사(洗馬寺)로 이름을 변경하였다가 1996년 다시 보적사로 바꾸었다. 보적사라는 이름에는 전해져 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삶이 어려운 노부부가 쌀이 2되밖에 남지 않아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구차하게 사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마음을 먹고 공양 한 후 집에 돌아오니 곳간에 쌀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 요사: 승려들이 머무르는 거처

개별안내판

수로 및 수구 水路, 水口 수로 및 수구는 성안의 물을 빼고 생활 하수를 배출하기 위한 것으로 길이 150cm, 폭 50cm이며, 바닥에는 널돌이 깔려 있고 덮개돌은 일부만 남아 있다. 수로와 연결된 수구는 높이 52cm, 폭 45cm로 서문과 암문 사이의 성벽에 설치되어 있다.

개별안내판

북문 北門 북문은 평거식 성문1)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2)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3)와 이름이 없다. 이 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순조 4년(1804)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1982년에 정비하였다. 1) 평거식성문: 양쪽 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상으로 걸쳐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 2)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3) 문루: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개별안내판

동문 東門 동문은 평거식 성문1)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2)이 각각 두 개씩 남아 있다.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3)와 이름이 없다. 동문은 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동문은 1982년에 정비하였다. 1) 평거식성문: 양쪽 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상으로 걸쳐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 2)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3) 문루: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개별안내판

서문 西門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 14년(1790)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1) 2개가 남아 있다. 1)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개별안내판

암문 暗門 암문은 평거식 성문1)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 2개가 남아 있다. 이 문은 순조 4년(1804)에 현륭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북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 개거식 성문2)을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하였다. 1) 평거식 성문: 양쪽 벽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수평상으로 걸쳐 방형의 통로를 만든 성문 2) 개거식 성문: 성문의 개구부상부가 개방된 형태의 성문

개별안내판

세마대 洗馬坮 세마대는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의 승전과 관련하여 성 안 꼭대기에 세워진 장대(將臺)1)로, 일제 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파괴되었다가 1957년 8월 15일 민관으로 구성된‘세마대 중건 위원회’에 의해 팔작지붕2)을 올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북쪽에는‘세마대(洗馬䑓)’라는 현판이, 남쪽에는‘세마대(洗馬坮)’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중 남쪽 현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글씨를 썼다. 1831년에 편찬된 『화성지』에는 세마대와 관련하여, ‘도원수 권율이 독산성에 들어갔다. 성안에 샘이 적어 오래 지키기에 어려웠다. 적이 염탐하여 그것을 알고서는 급히 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권율은 군사에게 적을 향하여 말을 세우고 쌀을 흩날리게 부어 씻게 하였다.그것을 본 왜적이 성안에 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포위를 풀고 갔다. 훗날 그곳을 세마대라 일컬으니 곧 지금의 장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1) 장대(將臺): 장수의 지휘대 2) 팔작지붕: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지붕

개별안내판

남문 南門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鎭南樓)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 『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1)의 규모는 6칸 이었으며, 남문은 영조, 정조, 순조 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 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2) 2개가 남아 있다. 1) 문루: 궁문, 성문, 지방관청의 바깥문 등의 위에 지은 건물 2) 문확석: 문짝을 여닫을 때 문짝이 달려 있게 하는 것

문화재 설명

독산성은 다른 이름으로 독성산성이라고도 한다.

선조 25년(1592)12월 임진왜란 중에 권율 장군이 전라도로부터 병사 2만여 명을 이끌고 이 곳에 주둔하여 왜병 수만 명을 무찌르고 성을 지킴으로써 적의 진로를 차단했던 곳이다.

독산성이 언제 만들어졌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원래 백제가 쌓은 성일 것으로 추측되며,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도 군사상 요충지로 쓰였을 것으로 본다. 선조 27년(1594) 백성들이 산성을 쌓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다시 보수하고, 그후 정조 16년(1792)과 20년(1796)에도 다시 공사했다.

성 둘레는 1,100m이고 문도 4개이지만 성 안에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다. 이런 결점때문에 이 곳에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이 있는데, 권율 장군이 산위로 흰 말을 끌어다가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시늉을 해 보이므로 왜군이 성안에 물이 풍부한 것으로 속아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독산성및세마대지 →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Also called Dokseongsanseong, Doksanseong Fortress was where General Gwon Yul stationed twenty thousand soldiers from Jeolla-do against the Japanese soldiers in the 2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1593) and mowed down a great number of the enemy’s forces and prevented the fortress from being captured by the enemy. It was not clear when Doksanseong Fortress was built, but it was likely constructed during the Baekje Period, serving as a strategic point of troops in the Unified Silla Period and Goryeo Period. People erected the fortress in the 27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and Byeon Eung-seong modified it in the 3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1602) after the Japanese Invasion ended. It was repaired in the 16th and 20th years of the reign of King Jeongjo, and again in 1792 and 1796. It had circumference of 3,240 meters and 4 gates, but the lack of water in the fortress had been considered a great demerit. In relation to this demerit, according to the legend of Semadae, the Japanese enemies thought that there was an abundant supply of water in the fortress when General Gwon Yul led a white horse and pretended to wash it with rice, so the Japanese forces withdrew.

秃山城又名秃城山城。宣祖26年(1593)壬辰倭乱时权栗将军从全罗道率领两万大军在此安营扎寨,击退数万倭寇,守护了山城,截断了敌人的进军路线。山城周长为3,240米,有四个城门,最大的缺点是城内缺水,因此这里流传着洗马台的传说,据说权栗将军为让倭寇相信山城中水源充足,便在山上用白米为白马洗身,从远处观望的倭寇误以为城内有取之不尽的水源,于是不战自退。

禿山城は他の名前で禿城山城とも呼ばれている。宣祖26年(1593)壬辰倭乱の最中に将軍権慄は全羅道から兵士2万余人を率いてここに駐屯し、倭軍数万人を破って城を守ったことによって、敵の進路を遮断した所である。城の周囲は3,240mで、門も4ヶ所があったが、城の中の水が不足するのが大きな欠点であった。このような欠点のため、ここには洗馬台の伝説があるが、権慄が山の上に白い馬を連れて行って白い米で馬を洗うふりをしたところ、倭軍が城の中に水が豊富にあると思って退いたという話が伝えら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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