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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기념물 제44호

사릉 석물 채석장 터 (思陵石物採石場址)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유적분포지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2019.08.08
소 재 지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30길 18 (수유동)
소유자(소유단체) 국유(산림청) 
관리자(관리단체) 강북구 
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강북구 문화관광체육과 02-901-6205

송계별업은 인조의 셋째 왕자인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1622~1658)의 유적지이다. 인평대군은 이곳에 머물기도 하면서 호를 송계(松溪)라 하였고, 자신의 문객(門客) 이신(李伸)에게 ‘구천은폭’을 써서 폭포 옆에 새기게 하는 등 이곳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658년 인평대군이 30대의 젊은 나이에 죽은 뒤 송계별업은 그의 아들들에게 넘겨져 가끔 이용하였을 것이다. 인평대군의 아들인 복창군 이정(李楨), 복선군 이남(李枏)과 복평군 이연(李㮒)은 종친으로서 너무 정치에 깊숙이 관련되었는데 특히 남인들과 친밀하였다.

그 뒤 송계별업은 주인을 잃고 방치되다가 왕릉의 대부석소가 설치되면서 훼철된 것 같다. 이번에 확인된 사릉 부석소 관련 각자는 그러한 정황을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릉부석감조필기’ 각자 기록은 다음과 같다.



司評李焌 / 奉事趙正誼 / 書吏朴興柱 / 石手趙金

歲己卯正月日 / 思陵浮石監役 / 畢後書記



이곳이 부석소로 선정된 것은 석질이 굳고 강했기 때문에 왕릉 석물에 적합하다는 표면(表面)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인평대군의 아들들이 남인들과 결탁하여 모략을 일삼던 장소를 철저히 훼철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구천은폭’과 ‘송계별업’ 각자가 남아 있게 된 것은 인평대군과 직접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차마 없애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송계별업은 그렇게 훼철되게 되었고, 자연스레 송계별업의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면서 ‘구천은폭’ 폭포만이 볼만한 장관으로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송계별업은 훼철된 채 기억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으나 휘릉과 사릉의 석물 채석이 이루어진 뒤에 ‘부석금표(浮石禁標)’ 각자를 동구(洞口)의 큰 바위에 새겨 놓았다. 부석금표가 언제 새겨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초의 부석이 이루어진 1626년 이후로 판단된다. 민간에서 석재를 채취하는 것을 금지한 것은 조선왕실에서 국장(國葬)이 발생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데 인평대군의 송계별업 터에서 석재 채취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부석소의 선정과정에 정치적인 고려도 일부 있었다는 의미여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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