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운형 묘소 서울 呂運亨 墓所 국가등록문화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1886~1947)의 묘소이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태양을 치마폭에 품은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그의 할아버지가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907년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양평에 지회를 만들어 활동하며 구국 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23세 때 집안 대대로 모셔 온 신주를 모두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노비를 해방시켜 주는 등 자신이 배워 옳다고 생각한 대로 봉건적 악습을 깨트리는 데 앞정서기도 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8년 11월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였다. 이 일로 2·8 독립선언과 3·1 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도깁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한 명연설로 일본 내각을 뒤흔들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보내져 옥살이를 한 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지금의 대한체육회인 조선체육회와 애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인 조선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 단체에서 회장이나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운동 경기를 항일 운동이자 민족 운동의 하나로 여겨 특히 청년들에게 체육으로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옷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로 폐간되었다. 1944년에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여 사회 혼란을 막고 새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1946년 신탁 통치 안을 두고 민족이 좌우로 대립하여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이 통치하는 현실에는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좌우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으로부터 12차례 공격을 당하였고, 끝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교차로에서 우익 세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장례는 해방 뒤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렀다. 국가에서 여운형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었으며,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여운형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통일된 조국에 다시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여운형의 묘소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은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돌렸다.
여운형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와 조선건국 동맹 등을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인물로, 이 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서울 여운형 묘소 서울 呂運亨 墓所 국가등록문화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여운형(1886~1947)의 묘소이다.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평군 신원리 묘골에서 태어났다. 태양을 치마폭에 품은 태몽을 꾸었다고 하여 그의 할아버지가 몽양이라는 호를 지었다고 한다. 1907년 일본에서 빌린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양평에 지회를 만들어 활동하며 구국 활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23세 때 집안 대대로 모셔 온 신주를 모두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노비를 해방시켜 주는 등 자신이 배워 옳다고 생각한 대로 봉건적 악습을 깨트리는 데 앞정서기도 하였다.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였고, 1918년 11월에는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견하였다. 이 일로 2·8 독립선언과 3·1 운동 등 항일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도쿄 제국호텔에서 조선 도깁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주장한 명연설로 일본 내각을 뒤흔들기도 하였다. 1929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보내져 옥살이를 한 뒤,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지금의 대한체육회인 조선체육회와 애한올림픽위원회의 전신인 조선올림픽위원회 등 각종 체육 단체에서 회장이나 위원장을 맡았다. 여운형은 운동 경기를 항일 운동이자 민족 운동의 하나로 여겨 특히 청년들에게 체육으로 독립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옷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한 일로 폐간되었다. 1944년에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인 건국동맹을 결성하였고, 해방 뒤 건국준비위원회로 전환하여 사회 혼란을 막고 새 국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1946년 신탁 통치 안을 두고 민족이 좌우로 대립하여 분단될 위기에 처하자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였다. 미군정이 통치하는 현실에는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하여, 노동자와 농민은 물론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포괄하는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정당을 만들어 좌우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우 세력으로부터 12차례 공격을 당하였고, 끝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교차로에서 우익 세력의 총에 맞아 숨졌다. 장례는 해방 뒤 최초의 인민장으로 치렀다. 국가에서 여운형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주었으며, 2008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주었다. 여운형의 시신은 포르말린으로 방부 처리되어 철로 만든 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통일된 조국에 다시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여운형의 묘소에는 묘비, 제물을 차려 놓은 상석, 향로를 올리는 향로석,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등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을 돌렸다.
여운형선생은 일제강점기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와 조선건국 동맹 등을 결성하여 항일독립운동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은 인물로, 이 곳은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교육적 가치가 큰 곳이다.
Yeo Un-hyeong is widely admired for devoting his life to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his fierce commitment to the struggle against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He served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and established the Joseon jungang ilbo (Korean Central Daily) and the Korean Independence League as part of his patriotic commitment. His distinguished achievement as an independence activist and a journalist was officially recognized by the Korean government with the Order of Merit for National Foundation.
吕运亨先生是一位独立运动家。日本统治时期,他致力在中国上海创建大韩民国临时政府、在韩国国内创立朝鲜中央日报和朝鲜建国同盟等活动,为实现国家独立自主做出了不懈努力;同时作为一位新闻工作者,他的功绩受到肯定,被授予大韩民国章。在这里,我们不仅可以缅怀革命先烈,还可以传承先烈的爱国精神。因此,该墓园具有极高的历史价值和教育价值。
呂運亨は、日帝強占期に中国の上海において大韓民国臨時政府を樹立し、韓国内では「朝鮮中央日報」と朝鮮建国同盟などを設立した。独立運動家として、そしてジャーナリストとして抗日独立運動を展開し、自主独立国家建設のために尽くしたその努力が認められ、建国勲章を受けた。ここは彼の愛国精神を讃えるという歴史的・教育的価値が高い場所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