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 장군 묘 李芳實 將軍 墓 경기도 기념물 제52호 이방실 장군 묘는 고려 후기의 무신인 이방실 장군과 그의 두 부인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묘소는 1978년 건립한 묘비가 있고, 근래에 세운 석물들이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묘에 쓰던 모습을 따라 세워져 있다. 이방실 장군은 1344년 고려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 시절 원나라에 들어갈 때 충목왕을 모신 공으로 중랑장이 되었으며, 공민왕 3년(1354) 대호군이 되자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다루가치 노연상 부자를 진압하였다. 공민왕 8년(1359) 평안도 철주에서 4만의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이듬해 평안도 함종에서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성을 되찾고 우두머리를 붙잡았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 20만이 평안도 삭주 쪽으로 다시 침입해 오자 서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방어하였으나 참패하여,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피신하고 수도인 개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1362년 총병관 정세운의 지휘 아래 안우, 최영 등과 개성을 다시 되찾고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김용이 공민왕의 문서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하였고 그 책임을 안우, 김득배와 함께 이방실에게 덮어 씌워 죽게 만들었다.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방실(李房實, 1298∼1362) 장군의 무덤이다. 장군은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모신 공을 인정받아, 왕이 즉위하자 무관의 벼슬인 중랑장에 오르게 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 4만 여명의 홍건적이 침입해오자 철주·철화·함종 등에서 관군들과 적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워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맡는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에 20여 만명의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여 개경까지 오자 정세운·최영 등 장군들과 합심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간신 김용(金鏞) 등의 모략으로 1362년(공민왕 11)에 살해되었다.
묘역은 그의 두 부인과 합장된 원형 단분(單墳 ; 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고려 후기 묘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7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묘역을 정비하였다. 봉분 정면 오른쪽에는 새로 만든 묘표가 있고, 봉분 아래로는 둘레석을 설치하였다. 그 앞으로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차례대로 있고, 하단에는 무석인 1쌍이 있는데 모두 1978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이 묘역은 경기도의 고려시대 역사인물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방실 장군 묘 李芳實 將軍 墓 경기도 기념물 제52호 이방실 장군 묘는 고려 후기의 무신인 이방실 장군과 그의 두 부인이 함께 묻힌 합장묘이다. 묘소는 1978년 건립한 묘비가 있고, 근래에 세운 석물들이 조선 시대 사대부의 묘에 쓰던 모습을 따라 세워져 있다. 이방실 장군은 1344년 고려 충목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 시절 원나라에 들어갈 때 충목왕을 모신 공으로 중랑장이 되었으며, 공민왕 3년(1354) 대호군이 되자 원나라의 요청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다루가치 노연상 부자를 진압하였다. 공민왕 8년(1359) 평안도 철주에서 4만의 홍건적을 물리쳤으며 이듬해 평안도 함종에서 홍건적에게 빼앗겼던 성을 되찾고 우두머리를 붙잡았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 20만이 평안도 삭주 쪽으로 다시 침입해 오자 서북면도 지휘사가 되어 방어하였으나 참패하여,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피신하고 수도인 개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1362년 총병관 정세운의 지휘 아래 안우, 최영 등과 개성을 다시 되찾고 홍건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김용이 공민왕의 문서를 위조하여 정세운을 죽게 하였고 그 책임을 안우, 김득배와 함께 이방실에게 덮어 씌워 죽게 만들었다.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홍건적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방실(李房實, 1298∼1362) 장군의 무덤이다. 장군은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모신 공을 인정받아, 왕이 즉위하자 무관의 벼슬인 중랑장에 오르게 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 4만 여명의 홍건적이 침입해오자 철주·철화·함종 등에서 관군들과 적을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워 왕명의 출납과 군기를 맡는 추밀원 부사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에 20여 만명의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여 개경까지 오자 정세운·최영 등 장군들과 합심하여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그의 공을 시기한 간신 김용(金鏞) 등의 모략으로 1362년(공민왕 11)에 살해되었다.
묘역은 그의 두 부인과 합장된 원형 단분(單墳 ; 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고려 후기 묘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으며, 197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묘역을 정비하였다. 봉분 정면 오른쪽에는 새로 만든 묘표가 있고, 봉분 아래로는 둘레석을 설치하였다. 그 앞으로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차례대로 있고, 하단에는 무석인 1쌍이 있는데 모두 1978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이 묘역은 경기도의 고려시대 역사인물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This is the tomb of General Lee Bang-sil (1298–1362) who fought to drive back the Red Turban Army during the late Goryeo Dynasty. General Lee was recognized for his service to King Chungmok while he was in Yuan China and was promoted to the high-level government position of military commander when the king ascended to the throne. When some 40,000 soldiers of the Red Turban Army attacked in 1359 (the 8th year of King Gongmin), General Lee fought against the enemy army alongside other military officers around Cheolju, Cheolhwa, and Hamjon, and achieved important victories. In recognition of these achievements, he was appointed Head of Chumilwon and was placed in charge of the royal accounts and military equipment. When some 200,000 members of the Red Turban Army attacked again in 1361 (the 10th year of King Gongmin) and marched toward Gaegyeong, Lee joined forces with General Jeong Se-hoon and General Choi Young to completely defeat the enemy and regain Gaegyeong. However, the treacherous Kim Yong and others who resented General Lee’s achievements plotted against him and eventually murdered him in 1362 (the 11th year of King Gongmin). General Lee and his two wives are buried in this tomb, which is a single circular burial mound. The tomb and the shape of the burial mound do not reflect the style typical of later Goryeo tombs. The reason for this is because the cemetery was renovated into a more modern style. Renovations included the addition of a new headstone to the front right side of the mound and a stone girth around the mound. Also near the tomb are a honyuseok (rectangular stone table), sangseok (wide stone table), and hyangroseok (square stone table for incense) as well as a pair of stone warriors that was newly made in 1978. The tomb holds high cultural value as it is the grave of an important historical figure from the Goryeo Dynasty in Gyeonggi Province.
这是高丽后期武臣,击退红巾军时立下汗马功劳的李芳实(1298∼1362)将军的坟墓。忠穆王在元朝时,将军辅佐其左右,因这份功劳,国王即位后将军被任命为武官职位——中郎将。1359年(恭愍王8年)4万多名红巾军入侵,将军在铁州、铁化、咸从等地联合官军击败敌人,立下赫赫功劳,成为了负责出纳王令和军纪的枢密院府使。1361年(恭愍王10年)20多万红巾军再次入侵,直逼开京,将军和郑世云、崔莹等将军携手,完全击退敌人并收复了开京。但是在心生嫉妒的奸臣金镛等人计谋下,于1362年(恭民王11年)被杀害。墓域是其与两位夫人合葬的圆形单坟(单个坟包)形式。坟墓形制或坟包形态等没有留下高丽后期坟墓的雏形,1978年按现代风格对墓域进行了重修。坟包正面右侧有新墓表,下面围着石头,前面依次摆放着魂游石、石供台、香炉石,下方有一对武石人,这些都是1978年建造的。该墓域作为京畿道重要高丽时期历史人物之墓,具有较高的文化遗产价值。
高麗後期の武臣で、紅巾の賊の排除に大きな手柄をたてたイ・バンシル(李芳実)将軍(1298~1362)の墓である。イ・バンシルはチュンモク(忠穆)王が元に滞在したときに仕えた功績により、王の即位とともに中郎将に就いた。1359年(恭愍王8年)におよそ4万人の紅巾の賊が侵入してくると、チョルジュ(鉄州)、チョルファ(鉄化)、ハムジョン(咸従)などで官軍と共同で敵を撃退するという大きな功績を挙げ、王命の出納と軍機を取り扱う枢密院の副使になった。1361年(恭愍王10年)に紅巾の賊20万人が再び侵入してケギョン(開京)まで攻め込んだ時に、チョン・セフン、チェ・ヨン(崔瑩)などの将軍と協力して敵を完全に退け、ケギョンを取り戻した。しかし、彼の成功を妬んだ奸臣キム・ヨン(金鏞)らの謀略により、1362年(恭愍王11年)に殺された。墓は円墳(1つの墳丘)の形をしており、彼の二人の妻と合葬されている。墓制や墳丘の形をみると、高麗後期の墓の原形が残っていないが、これは1978年、現代風に墓域を整備したため。墳丘正面の右側には新しい墓標があり、墳丘の下部には外護列石を設け、その前方に魂遊石、床石、香炉石が順を追って並んでおり、下段には武官の石像ペアが立っているが、これらはすべて1978年に新しく制作したものである。この墓域はキョンギ(京畿)道にとって重要な高麗時代の人物の墓であることから、文化財としての価値が高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