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 일원 金堤 金山寺 一圓 사적 제496호 모악산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그 후 유가종찰(법상종찰)과 미륵성지로 명성을 구축하였고,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기도 하였다.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 소현에 의해 대규모로 중창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불상을 모신 대사구, 경전의 판각과 편찬, 강의를 담당하는 광교원, 대중스님이 거주하는 봉천원의 3원 체제를 갖춘 대가람으로 일신되었다. 한국불교 역사상 불보*, 법보**, 승보***의 3보 사찰의 원형이 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뇌묵 처영대사는 1,000여 명의 승군을 훈련시키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행주산성, 독왕산성, 금산배 고개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남원 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보복으로 산내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고,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와 문도들에 의해 대사구역이 재건되었다. 그 후 1961년 송월주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중건과 중수를 계속하였다. 1986년 12월 6일 문화재청의 실측과정 중에 보물 제476호 대적광전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송월주 대종사와 문도들에 의해 1990년 복원되었으며, 대대적인 도량 정비를 거쳐 호남제일의 가람으로 웅장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문화재는 국보 1점, 보물 10점, 지방문화재 1점을 소유하고 있으며, 역사·문화·사상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보(佛寶):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를 높여 이르는 말 **법보(法寶):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승보(僧寶):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금산사 대적광전 金山寺 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화엄경」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연화장세계를 다른 말로 ‘대정적(大靜寂)의 세계’ 라고 하는데, 여기서 대적광전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금산사 대적광전의 본래 명칭은 대웅대광명전이었으며, 여기에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정유재란 (1597년) 때 금산사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서, 인조 13년(1635) 에 절을 중창하였다. 이때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모셨던 불상을 모두 한 건물에 모시고 전각의 이름을 대적광전으로 바꾸었다. 현재 대적광전 안에는 왼쪽에서부터 5여래인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불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왼쪽에서부터 6보살인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서 있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해 전각을 앞면 7칸, 옆면 4칸의 큰 규모로 조성하였다. 1968년에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보물 지정이 해제 되었고, 1990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 삼신불: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을 이름
금산사 적멸보궁 金山寺 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직접 예불을 드리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부처님의 분신과 다름없는 사리를 모시기 때문에 전각 안에 불상이나 불화 등은 모시지 않으며, 전(殿)이나 각(閣)보다 더 높은 의미에서 궁(宮) 이라고 한다. 금산사 적멸보궁의 뒤편에는 금강계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탑이 있다.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건물의 뒤쪽 벽에 금강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직접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열리는 부분을 작게 마련하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나한전이 있었으나, 1998년 금강계단을 정비하면서 나한전을 대적광전 뒤쪽으로 옮가고 지금의 적멸보궁을 새로 지었다.
금산사 명부전 金山寺 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녹사(錄事), 동자 등을 봉안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분이다.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고, 육도의 중생을 다 제도한 후 깨달음을 이루리다.” 라고 맹세하였다. 명부전의 내부 불단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이 있다. 양옆에는 중생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 준다는 무독귀왕과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린 도명존자가 서 있다. 또한 재판관인 10명의 시왕과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 실무 관리인 녹사 그리고 불법을 보호하는 인왕상이 서 있다. 명부전은 철종 8년(1857)에 대적광전과 마주 보는 위치에 건립하였으나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금산사 나한전 金山寺 羅漢殿 나한전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수행자인 아라한(阿羅漢)을 모신 전각으로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수행의 가장 높은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이루어 부처님의 말씀을 계승하는 역할을 한다. 불단 가운데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양쪽으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미래불인 미륵보살로 구성 된 삼존상을 봉안하였다. 삼존상의 양옆에는 부처의 여러 제자 중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이 있다. 불단 양옆에는 16나한상, 불단 뒤에는 계단식의 단에 오백 나한상을 모셨다. 현재의 금산사 나한전은 원래 적멸보궁 자리에 있었는데, 1996년에 방등계단을 성역화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다.
금산사 보제루 金山寺 普濟樓 보제루는 ‘널리 중생을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전각이다. 산속에 있는 절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의 문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보제루를 지나서 절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보제루는 절의 중심 공간이 가장 성스러워 보이게 하는 마지막 관문의 역할을 한다. 보제루는 누각의 밑을 지나거나 누각의 옆으로 돌아서 통과한다. 누각의 아래로 진입하는 경우에 아래층은 통로가 되고, 위층은 대중 집회의 장소나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금산사 보제루는 1976년에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새로 지었고, 1998년에는 앞면 9칸, 옆면 3칸으로 증축 하였다. 2003년에 금산사 개산 1400주년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현재는 수련회, 설법회 등을 개최하는 강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판은 신영복의 글씨이다.
금산사 범종각 金山寺 梵鐘閣, 범종각은 범종(梵鍾)·법고(法鼓)·운판(雲版)*·목어(木魚) 이 네 범음구**를 봉안한 전각이다. 의식이나 예불, 공양 시간을 알릴 때 각각의 기물을 사용한다. 범종은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다. 장엄하게 울리는 범종 소리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등 금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법고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 중생이 축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운판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허공의 날짐승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목어는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과 함께, 물속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범종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사물이 소리가 널리 퍼지라는 의미에서 사방에는 벽체를 세우지 않았다. *운 판 : 절에서,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아 놓고 시간을 알리려고 치는 기구 **범음구 : 부처님의 말씀인 범음을 만드는 도구
금산사 진표율사 金山寺 眞表律師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고승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계를 받았다. 760년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온몸을 바위에 부딪치며 혹독한 수행을 하였다. 스님은 마침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아 중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전해 받았다. 변산의 영산사에서 수행할 때는 미륵보살에게서 「점찰경」과 불과를 증명하는 간자 189개를 받았다. 이 증과간자는 스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고, 법당 안 벽에는 미륵보살에게서 계법*을 받는 모습을 그렸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매년 계단**을 개설하여 신라불교의 성행을 이끌었다. 율사는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나아가 왕에게 보살계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금강산 발연사에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입적하였다. 진표율사의 수행은 점찰법으로 유명하다. 점찰법은 수행 중에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전생의 선악업보와 현재의 길흉고락*** 을 점쳐 살피는 수행법이다. 손가락 크기의 나무쪽을 윷 던지듯 던져 선악을 관찰한다. 선정과 지혜를 얻기 어려울 때 참회법을 행하여 망령된 마음을 벗어난다고 한다. 7세기 초에 원광법사가 점찰법회를 처음 시행하였고, 진표율사가 대중적으로 정착시켜 고려시대에도 성행하였다. 한편 진표율사는 금산사가 창건 초기부터 지녔던 미륵신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미륵장육상을 봉안함으로써 미륵 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계법: 불제자가 받는 가르침 **계단: 계를 주는 법회가 이루어지는 단 ***길흉고락: 운이 좋고 나쁨과 괴로움과 즐거움
금산사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수호기 金山寺 龍溟堂 覺敏大師 伽藍守護記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19세기 후반 금산사와 호남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전주 출신으로 20세에 강릉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1879년에 완허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용명(龍溟)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각민대사는 수십 년을 금산사에 머물며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다. 장육 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고 전각과 탑을 보수하였다. 수백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어 절을 가꾸기도 하였다. 각민대사는 과거에 사라졌던 도승통제도를 부활하여 ‘호남도승통(湖南都僧統)’으로서 금산사는 물론 호남 불교를 이끌어 갔다. 1891년 귀암사 중창을 시작으로 소심선실, 운문암, 용흥사 중창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모악산은 오래전부터 금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1900년 절의 남쪽에 개설된 대규모의 금광이 채굴을 하면서 그 여파로 절에 심각한 피해가 생겼다. 이에 각민대사는 절을 수호하는 데 명운을 걸고 공사를 저지하여 마침내 관아에서 채광 금지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은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다. 스님은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았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끝내 입적하고 말았다. 스님은 죽음으로 절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한 위대한 순교자이다.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보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문화유산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다량의 국가지정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는 호국사찰로 역사적·문화사적 의의 등 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김제 금산사 일원 金堤 金山寺 一圓 사적 제496호 모악산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599)에 창건되었다.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크게 중창하였다. 그 후 유가종찰(법상종찰)과 미륵성지로 명성을 구축하였고,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되기도 하였다. 고려 문종 33년(1079) 혜덕왕사 소현에 의해 대규모로 중창되었고,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불상을 모신 대사구, 경전의 판각과 편찬, 강의를 담당하는 광교원, 대중스님이 거주하는 봉천원의 3원 체제를 갖춘 대가람으로 일신되었다. 한국불교 역사상 불보*, 법보**, 승보***의 3보 사찰의 원형이 되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뇌묵 처영대사는 1,000여 명의 승군을 훈련시키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행주산성, 독왕산성, 금산배 고개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남원 교룡산성을 수축하였다.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보복으로 산내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고, 인조 13년(1635) 수문대사와 문도들에 의해 대사구역이 재건되었다. 그 후 1961년 송월주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중건과 중수를 계속하였다. 1986년 12월 6일 문화재청의 실측과정 중에 보물 제476호 대적광전이 화재로 전소되었으나, 송월주 대종사와 문도들에 의해 1990년 복원되었으며, 대대적인 도량 정비를 거쳐 호남제일의 가람으로 웅장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문화재는 국보 1점, 보물 10점, 지방문화재 1점을 소유하고 있으며, 역사·문화·사상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불보(佛寶): 석가모니불과 모든 부처를 높여 이르는 말 **법보(法寶):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승보(僧寶): 부처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는 사람들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금산사 대적광전 金山寺 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에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화엄경」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연화장세계를 다른 말로 ‘대정적(大靜寂)의 세계’ 라고 하는데, 여기서 대적광전의 이름이 유래하였다. 금산사 대적광전의 본래 명칭은 대웅대광명전이었으며, 여기에 삼신불*을 봉안하였다. 정유재란 (1597년) 때 금산사의 모든 전각이 불에 타서, 인조 13년(1635) 에 절을 중창하였다. 이때 대웅대광명전과 극락전, 약사전에 모셨던 불상을 모두 한 건물에 모시고 전각의 이름을 대적광전으로 바꾸었다. 현재 대적광전 안에는 왼쪽에서부터 5여래인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약사불이 있다. 이들 사이에는 왼쪽에서부터 6보살인 대세지보살, 관음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서 있다. 이와 같이 많은 부처님을 봉안하기 위해 전각을 앞면 7칸, 옆면 4칸의 큰 규모로 조성하였다. 1968년에 보물 제476호로 지정되었으나 1986년 화재로 전소되면서 보물 지정이 해제 되었고, 1990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 삼신불: 법신 비로자나불, 보신 노사나불, 화신 석가모니불을 이름
금산사 적멸보궁 金山寺 寂滅寶宮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에 직접 예불을 드리기 위해 지은 전각이다. 부처님의 분신과 다름없는 사리를 모시기 때문에 전각 안에 불상이나 불화 등은 모시지 않으며, 전(殿)이나 각(閣)보다 더 높은 의미에서 궁(宮) 이라고 한다. 금산사 적멸보궁의 뒤편에는 금강계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탑이 있다. 적멸보궁 안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건물의 뒤쪽 벽에 금강계단에 있는 사리탑에 직접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열리는 부분을 작게 마련하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나한전이 있었으나, 1998년 금강계단을 정비하면서 나한전을 대적광전 뒤쪽으로 옮가고 지금의 적멸보궁을 새로 지었다.
금산사 명부전 金山寺 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시왕(十王)과 판관(判官), 녹사(錄事), 동자 등을 봉안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분이다.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 “지옥이 텅 비지 않는다면 결코 성불을 서두르지 않고, 육도의 중생을 다 제도한 후 깨달음을 이루리다.” 라고 맹세하였다. 명부전의 내부 불단에는 중앙에 지장보살이 있다. 양옆에는 중생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 준다는 무독귀왕과 사후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이 본 바를 세상에 알린 도명존자가 서 있다. 또한 재판관인 10명의 시왕과 재판을 보조하는 판관, 실무 관리인 녹사 그리고 불법을 보호하는 인왕상이 서 있다. 명부전은 철종 8년(1857)에 대적광전과 마주 보는 위치에 건립하였으나 19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금산사 나한전 金山寺 羅漢殿 나한전은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수행자인 아라한(阿羅漢)을 모신 전각으로 응진전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은 수행의 가장 높은 경지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이루어 부처님의 말씀을 계승하는 역할을 한다. 불단 가운데에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양쪽으로 과거불인 제화갈라보살, 미래불인 미륵보살로 구성 된 삼존상을 봉안하였다. 삼존상의 양옆에는 부처의 여러 제자 중 으뜸이라고 하는 아난과 가섭이 있다. 불단 양옆에는 16나한상, 불단 뒤에는 계단식의 단에 오백 나한상을 모셨다. 현재의 금산사 나한전은 원래 적멸보궁 자리에 있었는데, 1996년에 방등계단을 성역화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었다.
금산사 보제루 金山寺 普濟樓 보제루는 ‘널리 중생을 극락세계로 이끌어 주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전각이다. 산속에 있는 절은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의 문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보제루를 지나서 절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보제루는 절의 중심 공간이 가장 성스러워 보이게 하는 마지막 관문의 역할을 한다. 보제루는 누각의 밑을 지나거나 누각의 옆으로 돌아서 통과한다. 누각의 아래로 진입하는 경우에 아래층은 통로가 되고, 위층은 대중 집회의 장소나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금산사 보제루는 1976년에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새로 지었고, 1998년에는 앞면 9칸, 옆면 3칸으로 증축 하였다. 2003년에 금산사 개산 1400주년 기념관으로 개관하여 현재는 수련회, 설법회 등을 개최하는 강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판은 신영복의 글씨이다.
금산사 범종각 金山寺 梵鐘閣, 범종각은 범종(梵鍾)·법고(法鼓)·운판(雲版)*·목어(木魚) 이 네 범음구**를 봉안한 전각이다. 의식이나 예불, 공양 시간을 알릴 때 각각의 기물을 사용한다. 범종은 절에서 시각을 알리거나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다. 장엄하게 울리는 범종 소리는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등 금지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법고 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 중생이 축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운판의 맑고 은은한 소리는 허공의 날짐승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다. 목어는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과 함께, 물속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범종각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양식이다. 사물이 소리가 널리 퍼지라는 의미에서 사방에는 벽체를 세우지 않았다. *운 판 : 절에서,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아 놓고 시간을 알리려고 치는 기구 **범음구 : 부처님의 말씀인 범음을 만드는 도구
금산사 진표율사 金山寺 眞表律師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고승으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2세에 출가하여 금산사 숭제법사에게 계를 받았다. 760년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온몸을 바위에 부딪치며 혹독한 수행을 하였다. 스님은 마침내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감응을 받아 중생을 가르치는 방법을 전해 받았다. 변산의 영산사에서 수행할 때는 미륵보살에게서 「점찰경」과 불과를 증명하는 간자 189개를 받았다. 이 증과간자는 스님이 중생을 교화하는 중요한 방법이 되었다. 이후 금산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고, 법당 안 벽에는 미륵보살에게서 계법*을 받는 모습을 그렸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에 매년 계단**을 개설하여 신라불교의 성행을 이끌었다. 율사는 경덕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에 나아가 왕에게 보살계를 베풀어 주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금강산 발연사에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입적하였다. 진표율사의 수행은 점찰법으로 유명하다. 점찰법은 수행 중에 산란한 마음이 일어나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전생의 선악업보와 현재의 길흉고락*** 을 점쳐 살피는 수행법이다. 손가락 크기의 나무쪽을 윷 던지듯 던져 선악을 관찰한다. 선정과 지혜를 얻기 어려울 때 참회법을 행하여 망령된 마음을 벗어난다고 한다. 7세기 초에 원광법사가 점찰법회를 처음 시행하였고, 진표율사가 대중적으로 정착시켜 고려시대에도 성행하였다. 한편 진표율사는 금산사가 창건 초기부터 지녔던 미륵신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미륵장육상을 봉안함으로써 미륵 신앙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계법: 불제자가 받는 가르침 **계단: 계를 주는 법회가 이루어지는 단 ***길흉고락: 운이 좋고 나쁨과 괴로움과 즐거움
금산사 용명당 각민대사 가람수호기 金山寺 龍溟堂 覺敏大師 伽藍守護記 용명당 각민대사(1846~1902)는 19세기 후반 금산사와 호남 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전주 출신으로 20세에 강릉 정토사에서 출가하였다. 1879년에 완허스님에게 인가를 받고 용명(龍溟)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각민대사는 수십 년을 금산사에 머물며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다. 장육 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고 전각과 탑을 보수하였다. 수백 그루의 나무와 꽃을 심어 절을 가꾸기도 하였다. 각민대사는 과거에 사라졌던 도승통제도를 부활하여 ‘호남도승통(湖南都僧統)’으로서 금산사는 물론 호남 불교를 이끌어 갔다. 1891년 귀암사 중창을 시작으로 소심선실, 운문암, 용흥사 중창 등의 불사를 계속하였다.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모악산은 오래전부터 금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1900년 절의 남쪽에 개설된 대규모의 금광이 채굴을 하면서 그 여파로 절에 심각한 피해가 생겼다. 이에 각민대사는 절을 수호하는 데 명운을 걸고 공사를 저지하여 마침내 관아에서 채광 금지령을 받아냈다. 그러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1902년 새해 첫날 채광꾼들은 다시 금산사를 침범하였다. 스님은 미륵전 앞 잣나무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온몸으로 채광꾼들을 막았으나 그들이 던진 돌과 쇠망치에 끝내 입적하고 말았다. 스님은 죽음으로 절을 지키고 불교를 수호한 위대한 순교자이다.
백제시대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김제 금산사는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의 중창불사 이후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륵신앙의 본산으로 법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후백제 견훤의 유배지로도 알려진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혜덕왕사가 법상종 관련 불서의 간행 및 유포에 힘쓰는 한편 금산사를 중창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국사찰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국보 미륵전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조문화유산 및 조선후기의 목조건축 등 다량의 국가지정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는 호국사찰로 역사적·문화사적 의의 등 학술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Geumsansa Temple is thought to have been founded during the Baekje Kingdom (18 B.C.- A.D.660). It underwent major reconstruction work under the initiative of Master Jinpyo during Unified Silla (676-935) and has been a center of the cult of Maitreya, the Future Buddha, for the past 1,400 years. Gyeonhwon (867-936), the founder of Later Baekje, was once incarcerated at this temple. During the Goryeo Period, Royal Preceptor Hyedeok (1038-1096) had the temple repaired, and published and disseminated Buddhist texts related to the Dharmalaksana Sect while he was staying there. The temple was also a defense stronghol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1592-1598. The temple has outstanding historical and cultural value owing to the presence of eleven state-designated cultural heritages, including Mireukjeon Hall (National Treasure No. 62), stone artifacts of the Goryeo Period (918-1392), and wooden buildings from the late Joseon Dynasty (1392-1910), within its grounds.
相传金堤金山寺始建于百济时代,在统一新罗时代真表律师重建佛寺后被视为具有一千四百多年历史的弥勒信仰的本山,法脉延续至今,此处还后以百济甄萱的流放地而著称。高丽时代慧德王师致力于刊行和散布与法相宗相关的佛书,同时重建了金山寺,壬辰倭乱时期金山寺发挥了护国寺院的作用。金山寺内保存着国宝第62号弥勒殿、高丽时代石造文化财以及朝鲜后期的木制建筑等11件,国家指定为文化财,具有重要的历史•文化史意义,在学术方面也具有重要学术价值。
百済時代に建立した寺刹と伝えられている金堤金山寺は、統一新羅時代の真表律師が再建して以来、1400余年の歴史を持つ弥勒信仰の本山としての法脈を保っており、後百済甄萱の配流地としても知られている寺刹である。高麗時代には慧徳王師が法相宗関連仏書の刊行及び流布に力を尽くすかたわら、金山寺を再建し、壬辰倭乱の時には護国寺刹としての役割を果たした。国宝第62号の弥勒殿をはじめ、高麗時代の石造文化財及び朝鮮後期の木造建築など11点の国家指定文化財が保存されている護国寺刹で、歴史的・文化史的、また学術的に重要な価値を持っている。
김제 금산사 일원-육각다층석탑
김제 금산사 일원-방등계단과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일원 전경
김제 금산사 일원-노주
김제 금산사 일원-당간지주
김제 금산사 일원-미륵전
김제 금산사 일원-대장전
금산사
금산사
김제 금산사 일원_나한전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노주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내부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내부2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내부3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처마와 미륵전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현판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대적광전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명부전 내부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명부전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방등계단 사리탑 앞 석상들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방등계단 사리탑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방등계단 앞에서 본 오층석탑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범종각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오층석탑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오층석탑에서 바라 본 미륵전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오층석탑에서 바라 본 전경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입구전경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적멸보궁에서 바라 본 오층석탑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전경1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전경2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전경3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_전경4 (촬영년도 : 2015년)
김제 금산사 일원 -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