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圓眞國師碑 보물 원진국사비는 고려 시대 승려 승형의 탑비로서, 탑비란 승려가 출생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새긴 비를 말한다. 승형은 고려 명종 때인 1172년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13세 때 승려가 되었다.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하였으며, 능엄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고려 고종 때인 1215년에 왕의 부름을 받아 보경사의 주지를 지내며 사찰을 발전시켰다. 승형이 51세 때 입적하자 고종은 존경의 의미로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국사****로 칭하였다. 비는 승형이 입적한 후 3년 뒤인 1224년에 세웠는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몸돌인 비신(碑身)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몸돌 윗부분 양 끝을 접듯이 자른 것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며, 몸돌 둘레에 장식된 덩굴무늬는 고려 시대 중기 이후에 제작된 탑비의 특징이다. *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 ** 능엄선(楞嚴禪): 선종의 주요 경전인 『능엄경(楞嚴經)』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참선 수행법 *** 시호(諡號): 벼슬을 하거나 덕목이 높은 사람이 죽은 후에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 국사(國師):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 나라에서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내린 가장 높은 칭호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圓眞國師碑 보물 원진국사비는 고려 시대 승려 승형의 탑비로서, 탑비란 승려가 출생해서 입적*할 때까지의 행적을 새긴 비를 말한다. 승형은 고려 명종 때인 1172년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13세 때 승려가 되었다. 명산을 돌아다니며 공부하였으며, 능엄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고려 고종 때인 1215년에 왕의 부름을 받아 보경사의 주지를 지내며 사찰을 발전시켰다. 승형이 51세 때 입적하자 고종은 존경의 의미로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국사****로 칭하였다. 비는 승형이 입적한 후 3년 뒤인 1224년에 세웠는데,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위에 몸돌인 비신(碑身)을 세운 간결한 모습이다. 몸돌 윗부분 양 끝을 접듯이 자른 것은 고려 시대에 유행한 양식이며, 몸돌 둘레에 장식된 덩굴무늬는 고려 시대 중기 이후에 제작된 탑비의 특징이다. *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 ** 능엄선(楞嚴禪): 선종의 주요 경전인 『능엄경(楞嚴經)』을 바탕으로 공부하는 참선 수행법 *** 시호(諡號): 벼슬을 하거나 덕목이 높은 사람이 죽은 후에 왕으로부터 받은 이름 **** 국사(國師):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 전기까지 나라에서 스승이 될 만한 승려에게 내린 가장 높은 칭호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This memorial stone dedicated to a great Buddhist monk named Wonjin (secular name: Shin Seung-hyeong) of the Goryeo Dynasty stands in the precinct of the Bogyeongsa Temple. Born in 1171 (the first year of King Myeongjong), Wonjin became a monk at the age of 13 and made the head monk of the temple by the king's command. When he died at the age of 51, King Gojong of Goryeo gave him the posthumous title of Wonjin as well as the rank of State Preceptor, one of the highest honors a monk could achieve. In lieu of a capstone, the top corners of the memorial stone have been rounded off, the style that became popular in the Goryeo Dynasty. The base is carved into the shape of a tortoise whose head looks like a dragon with the dragon ball in its mouth. The Chinese character of "王" meaning ‘king’ is inscribed in each of the shell of the tortoise. The support for the memorial stone sets on the back of the tortoise, which is decorated with lotus petals. The sides of the memorial stone are decorated with an arabesque design and it is another characteristic of stonework during the Goryeo Dynasty. Erected to the memory of Wonjin, the epigraph inscribed on this memorial stone was composed by a civil minister and scholar named Yi Gong-ro and written by the famous calligrapher Kim Hyo-in. The calligraphy, done in Quyang Xun style, shows free and powerful strokes. According to the epigraph, the memorial stone was made in 1224 (11th year of King Gojong), 3 years after Wonjin died.
位于宝镜寺内,是高丽中期僧侣圆真国师的塔碑。圆真国师(1171-1221)13岁成僧,游遍名山修道,奉王之诏任宝镜寺主持。51岁圆寂,高宗赐予他国师的礼遇和“圆真”的谥号。碑文记载了圆真国师的生平事迹,由当时的文臣李公老撰写、金孝印题写。据碑文记载,圆真圆寂三年后的高宗11年(1224)石碑修建完毕。
宝鏡寺にある、高麗中期の僧侶であった円真国師の塔碑である。円真国師(1171~1221)は13歳で僧侶になり、名山を巡りながら修道し、王の指名で宝鏡寺の住職となった。51歳で入寂すると、高宗は彼を国師と礼遇し、諡を「円真」とした。碑文には円真国師の生涯と行跡が記録されており、文は当時の文臣であった李公老が作り、金孝印が字を書いた。碑文によると、碑が完成されたのは高宗11年(1224)で、円真が入寂してから3年後のこと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