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스캔영상
관련 문화재 | 경주 양동 향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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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분류 | 목조건축 |
파일유형 | MP4 |
사업명 | 2014년 문화유산 디지털세트 3차원 DB구축 |
파일용량 | 57.9MB |
제작연도 | 2014 |
공공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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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
보물 제412호 경주 양동 향단 - 본 영상은 3차원 광대역 스캐닝 기술을 기반으로 제작한 영상입니다. - 《경북 지방 고문서 집성》에 따르면 원래 양동에는 고려 말 여강 이씨 이광호(李光浩)가 처음 정착하여 손자 사위인 풍덕 류씨 류복하(柳復河)가 처가를 따라 이곳에 왔다. - 이어 조선 세조 때 경주(월성) 손씨 손소(孫昭, 1433-1484)가 류복하의 무남독녀에게 장가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 그 후 이광호의 5대 종손인 이번(李蕃)이 손소의 외동딸에게 장가들어 양동에 뿌리를 내리면서 이 마을은 손씨와 이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 양동마을 초입에 들어서면 물봉동산을 배경으로 경사진 대지에 지어진 커다란 기와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이 집이 바로 향단(香壇)이다. - 회재 이언적(1491~1553)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었을 때 거의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1542년 중종이 특별히 지어준 건물이다. 본래 99칸이었으나 지금은 56칸만 남아 있다. - 향단은 풍수지리에 의해 안채는 月자형으로 하고, 여기에 ㅡ자형 행랑채와 칸막이를 두어 用자형으로 만들었다. - 중앙과 좌우 양쪽 끝을 각각 이어서 전체 건물을 日자형의 한 건물 같이 배치하였다. - 건물의 배치나 평면의 형태도 풍수에 따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향단과 같이 ‘일(日)’자나 ‘구(口)’자는 길상자로 여겨왔다. - 행랑채 뒤편으로는 6벌대의 매우 높은 정침의 기단과 행랑채 추녀 사이 안채로 들어가는 협소한 길이 있다. - 중문 앞에 계단이 없고 안채의 출입문이 좁은 것은 안채를 보호하려는 의도이자 외부인이 쉽게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 안채는 사랑채 건넌방 옆의 추녀 아래로, 약간 벌어진 공간을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그리고 사랑 뒤편의 안채 중문을 통하여 안마당으로 내려서도록 동선을 만들어 놓았다. - 정침은 행랑채의 중인방 높이까지 올라오는 기단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문 옆의 협문을 통하여 높은 기단으로 올라가는 잘 다듬은 장대석으로 7단을 놓고 사랑마당이 펼쳐진다. - 큰사랑채는 두 칸의 온돌방에 뒤쪽으로 받침을 두고 마당쪽으로는 쪽마루를 꾸몄으며 그 아래 아궁이를 두었다. - 사랑채의 규모는 정면 네 칸에 측면 두 칸의 초익공 5량 구조로, 기둥머리는 주두를 두고 초익공의 가구에 보를 받치는 보아지를 받치고 있다. - 안방은 앞에 쪽마루를 달고 남쪽으로는 난간을 갖춘 넓은 대청을 만들어 비교적 아늑하고 한가로운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 대청 앞으로는 행랑채의 지붕선이 앞을 가리고 있는데, 안채 마루에서 생활하는 아녀자들의 보호를 위해 막아지는 배려가 돋보인다. - 향단은 외부의 모습이 매우 개방적일 수밖에 없는 지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내부 공간을 폐쇄적으로 만들어 아늑한 분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 돋보이며, 이로 인해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벗어난 독특한 평면 구성을 보여주는 고택으로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 문화재청, 보물 제 412호 경주 양동 향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