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 제--호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 상
(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上)

[ 번역 해제 ]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懿昭世孫墓所都監儀軌)』 1. 의소세손은 누구인가? 1752년(영조 28) 3월부터 5월까지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묘소를 양주(楊州) 안현(鞍峴)에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의소세손은 조선의 왕세손이자 추존 왕세자로, 조선의 21대 왕 영조(英祖)의 장손이자 장조(莊祖, 사도세자:1735~1762)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1735~1815)의 적장자이다. 이름은 정(琔)이고, 초명은 창흥(昌興)이었다. 의소(懿昭)는 시호이다. 정조의 동복형이자 은언군ㆍ은신군ㆍ은전군의 이복형이다. 사후 고종 때에 세자와 태자로 추존되었다. 1750년 8월 27일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출생하였는데, ‘날 때부터 석대(碩大)하였고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2년 만인 1752년 3월 4일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사망하였다. 1751년 5월 13일에 세손으로 봉하여 오장복(五章服)을 입히고 숭문당(崇文堂)에서 품에 안고 예를 행하였다. 책봉할 때에 이름을 정(琔)이라 하고 창경궁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기거하였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1752년 4월 12일 세손의 빈궁(殯宮)에 ‘의소’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덕성(德性)이 순숙(純淑)한 것을 의(懿)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손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사실 처음 의소세손을 낳았을 때 영조는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영조가 총애하던 화평옹주가 해산을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평옹주를 꿈에 본 후 영조는 옹주의 환생으로 생각하고 세손을 각별히 대하였다. 의소세손은 짧은 생애 만큼이나 그에 관한 기록도 소략하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묘소 조성에 사용된 의식이 『상례보편』에 의거했음이 나타난다. 『상례보편』은 『국조상례보편』을 말하는 것으로, 상례(喪禮) 가운데 하교하여 줄여 없애거나 이정(釐正)한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상례수교(喪禮受敎)』라 했다가 이름을 고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라 한 것이다. 영조대에 『국조상례보편』이 편찬된 후 상례에 관한 의례는 『국조오례의』 규정보다 우선하여 적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 의궤의 기록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에는 물론이고,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 때에 『국조상례보편』의 원칙은 정조 즉위 초에 있었던 영조의 국상에 준거의 틀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영조실록』은 봉묘의 규격과 후면에 쓴 어제문(御製文)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영조가 의물의 수효도 줄이고, 제도도 줄이라고 한 부분은, 세손의 묘소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왕실의 무덤은 왕이나 왕비의 무덤인 능(陵)이 최고의 격을 갖추었고, 능 다음으로 왕이나 왕비가 되지 못한 왕의 사친의 무덤인 원(園)이 있었다. 세자나 세손의 무덤은 일반 사대부의 무덤처럼 묘(墓)로 칭하였다. 2. 의궤의 구성과 주요 내용 본 의궤는 의소세손의 장례 후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1752년 3월 4일 세손이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서 훙서(薨逝)하자, 빈궁(殯宮)ㆍ예장(禮葬)ㆍ묘소(墓所) 세 도감(都監)이 설치되었다. 왕의 장례식에 빈전(殯殿)ㆍ국장(國葬)ㆍ산릉(山陵) 도감이 설치되는데 비하여, 세손의 장례였기 때문에 빈궁, 예장, 묘소의 세 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이 가운데 묘소도감에서는 의소세손이 묻힐 묘소와 의례를 행할 건축물을 영건하는 일을 주로 추진하였는데 이 공역(工役)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본 의궤이다.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세자나 세손빈의 묘소를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소현세자묘소도감의궤(昭顯世子墓所都監儀軌)』,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소도감의궤』, 『효명세자(孝明世子) 묘소도감의궤』 등이 소장되어 있다. 왕세손의 묘소를 조성한 경우는 흔치 않는 사례로서 본 의궤가 유일하다. 조선후기 묘소도감의궤는 대체로 4건 내지 5건 정도가 제작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제작 기간의 경우 일정한 기일이 정해진 것은 아니나 대체로 2개월 내지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본 의궤의 편찬은 묘소도감에서 담당했고, 의궤는 행사가 완료된 후에 상하 2책으로 편찬되었다. 상책은 좌목(座目)ㆍ계사(啓辭)ㆍ이문(移文)ㆍ내관(來關)ㆍ감결(甘結)이 수록되어 있고, 하책은 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ㆍ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록과는 달리 상책에 감결에 이어 의궤ㆍ서계ㆍ논상이 수록되었고, 하책은 번와소까지 기록되어 있다. 목록과 본문의 내용의 다른 것은 의궤의 제작에서 가끔씩 나타나는 양상인데, 의궤가 문서철의 성격인 만큼 목록의 순서대로 문서를 정리하다가 여의치 않은 경우 문서의 순서를 조정하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하책의 160장 이후에는 일부 접혀진 자국이 있는 것도 눈에 뛴다. 제1책의 표지에는 제목이 없으며, ‘COREEN 2512’라는 도서 번호가 붙어있다. 표지에 ‘懿昭世孫墓所儀軌上(懿昭墓 壬申)’이라는 첨지도 붙어있다. 표지에 이어서 본 의궤의 상권 가장 앞부분에는 옹가전면도(甕家前面圖)와 옹가후면도(甕家後面圖)가 나온다. ‘옹가(甕家)’는 국가의 장례가 있을 때 비와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관이 들어갈 구덩이 위쪽에 임시로 세우는 뜸집이나 장막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옹가의 그림과 함께 기둥ㆍ도리(道里)ㆍ춘연(春椽)의 개수와 길이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옹가전면도와 옹가후면도에는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는데, 이것은 파리국립도서관이 절도 등을 방지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에는 책의 목차에 해당하는 ‘의소세손 묘소도감의궤 목록(目錄)’이 나온다. 목록은 좌목(座目), 계사(啓辭), 이문(移文), 내관(來關), 감결(甘結), 각소(各所)-삼물소(三物所)ㆍ조성소(造成所)ㆍ대부석소(大浮石所)ㆍ노야소(爐冶所)ㆍ보토소(補土所)ㆍ소부석소(小浮石所)ㆍ수석소(輸石所)ㆍ별공작(別工作)ㆍ분장흥고(分長興庫)ㆍ번와소(燔瓦所), 부(附)-의궤(儀軌)ㆍ서계(書啓)ㆍ논상(論賞)의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하단에도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던 시절에 찍은 독수리 인장이 찍혀있다. 목록에 이어서 첫 부분은 ‘乾隆 十七年 壬申 三月 日 墓所都監儀軌’로 시작된다. 이 부분에는 의소세손의 훙서(薨逝) 일시 및 묘소도감의 담당 인물들 명단이 실려 있다. 계사질(啓辭秩)은 의소세손이 훙서한 3월 4일부터 묘소에 장사지내고 마무리 작업을 한 5월 15일까지 묘소도감에서 왕에게 올린 문건 및 여타 기관에서 관련 사안을 올린 문건과 재가를 받은 내용을 날짜순으로 모은 것이다. 묘소를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업무 분장에 관한 것, 필요한 자재 조달 및 공역의 진행에 관한 보고내용이 주를 이룬다. 이문질(移文秩)은 묘소 조성의 공역(工役)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묘소도감에서 동급 기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보낸 공문서들을 시간 순서대로 모아 놓은 것이다. 수신처는 강원감영ㆍ황해감영ㆍ경기감영 등 각도의 감영 및 지방관 그리고 공역과 관련되어 인력과 물품 등을 관할하는 훈련도감ㆍ호조ㆍ선혜청ㆍ한성부ㆍ진휼청 등의 중앙의 관서들이다. 주요 내용은 묘소 조성에 필요한 각종 재료인 석물ㆍ재목ㆍ철물 등의 공급을 비롯하여, 각도에 배당한 석수ㆍ목수ㆍ역부 등 묘소 조성에 필요한 인력을 요청하는 문서이다. 내관질(來關秩)에는 장흥고(長興庫)ㆍ와서(瓦署)ㆍ선공감(船工監)ㆍ호조(戶曹)ㆍ강원 감사ㆍ황해 감사 등에서 보낸 첩정(牒呈)이 실려 있다. 담당자를 분차(分差)한 일과 묘소 조성에 필요한 소요 물품 및 각종 물품의 조달 상황, 장인(匠人)과 모군(募軍)들의 요포 지급 등이 주요 내용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리고 각 첩정(牒呈)의 말미에는 ‘접수함’ 등 접수의 여부를 표시해 두었다. 감결질(甘結秩)은 묘소도감에서 하급 관청에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내린 공문을 모은 것으로, 필요한 물자와 인원 조달에 관한 내용 및 각종 의식의 시행 날짜 및 준비 상황 등이 주로 기재되어 있다. 각각의 문서 말미에는 어느 관청에 보낸 문서인지 명시되어 있다. 이어서 목록과는 달리 부(附) 의궤(儀軌), 서계(書啓), 논상(論賞)에 해당하는 내용이 상책의 후반부에 나온다. 맨 앞의 목록에는 부 의궤와 서계, 논상이 맨 마지막에 나오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들이 모두 상책의 후반부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의궤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 의궤에 해당하는 사항은 ‘임신년 5월 10일 의궤’라고 한 후에 ‘빈궁ㆍ혼궁ㆍ예장ㆍ묘소도감의 의궤사목(儀軌事目)에 대한 별단(別單)’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사목은 의궤의 제작과 관련된 사항으로, 세 도감의 처소는 전의감(典醫監)으로 한다는 것, 세 도감에서 각 5건씩 작성하는데, 1건은 어람용이고 나머지 4건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강화부 등에 나누어 보관한다는 것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분상처로 어람용을 비롯하여 총 5곳이 나타나 있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의궤는 어람용 1건 뿐이다. 특히 의소세손의 장례식 과정을 기록한 『의소세손예장도감의궤(懿昭世孫禮葬都監儀軌)』 상, 하 2 책의 경우도 실제적으로 어람용 1건만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의소세손의 장례와 관련된 연구에 있어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외규장각 의궤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어 서계(書啓)에 해당하는 내용으로는 ‘세 도감의 도제조 이하의 명단을 서계하라’는 기록에 나타난다. 5월 15일 묘소도감에서는 별단(別單)’을 올렸다. 별단에는 도제조로부터 도청, 낭청, 상지관 등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근무일수를 기록하였고, 장인들은 소속 부서별로 그 명단을 기록하였다. 도제조 김약로가 3월 4일에 계하(啓下)를 받아 5월 15일까지 근무한 것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의궤 제작과 관련하여서는 8월 20일의 기록이 주목된다. 즉 의궤를 장황(粧䌙)해 보니 한 책으로 만들면 열람하기에 불편하여 두 책으로 나누어 만들겠다고 아뢰고 이를 허락한 내용이 나온다. 본 의궤가 2책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한 ‘빈궁도감과 혼궁도감의 의궤는 근년의 규례대로 한질로 만든다.’고 하였는데, 현존하는 『의소세손빈궁혼궁도감의궤(懿昭世孫殯宮魂宮都監儀軌)』가 빈궁과 혼궁이 합쳐진 제목으로 존재하는 것을 보면, 이 규례가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 의궤의 상책에서 눈여겨 볼 내용은 영조가 세손인 의소세손의 묘소 조성을 하는데 있어서, 체모는 갖추되 차등 있게 진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때, 그 제도는 효장세자를 장사지냈을 때의 예로써 하려고 했다. 영조가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각별히 절약할 것을 강조했던 점도 주목된다. 한편, 의소세손의 묘소를 조성하는 작업에서 목재의 조달이 가장 시급한 문제로 떠올랐으며, 이를 위해 묘소도감을 비롯하여 각 관청에서 주의를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책은 공역을 담당한 각소(各所)에 대한 기록으로, 내용은 각소(各所) 별로 정리하여 실려 있다. 석회(石灰)ㆍ세사(細沙)ㆍ황토(黃土) 세 가지를 섞어서 묘소의 광(壙)과 봉분을 만드는 역소인 삼물소(三物所), 묘소 일원에 정자각(假丁字閣)ㆍ옹가(瓮家)ㆍ비각ㆍ홍살문 등 각종 목조 건물의 축조를 담당하는 조성소(造成所), 묘에 배설하는 석물을 만드는 대부석소(大浮石所), 공역에 필요한 철물을 만드는 노야소(爐冶所), 묘역의 이지러진 지형에 흙을 보강하고 사초(莎草)를 입히는 보토소(補土所), 건축물 및 향어로(香御路)에 쓰이는 석물을 만드는 소부석소(小浮石所), 돌을 나르는 수석소(輸石所), 이외의 필요한 물품을 고안하고 만들어내는 별공작(別工作), 재궁(齋宮) 및 찬궁(欑宮) 그리고 각종 건물에 들어가는 도배(塗褙) 및 바닥에 까는 포진(鋪陳)을 마련하는 분장흥고(分長興庫), 기와와 벽돌을 구워 제공하는 번와소(燔瓦所)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묘소도감의궤의 각소의궤(各所儀軌)에는 광(壙)의 조성, 정자각과 옹가 등의 축조, 각종 철물의 제작, 묘소 주변의 대석물(大石物)의 조성, 묘소 주변의 흙을 돋우는 작업, 묘소 주변 부속 건물의 석물 제작, 석물의 운반, 도청 이하 각소에 지급하는 비품의 제작, 돗자리와 유둔(油芚) 등의 관리, 기와 벽돌의 제작 등 작업에 관한 기록이 기본적으로 실려 있다. 그리고 각종 건축물에 소용된 재료와 작업에 참여한 장인들의 실명(實名)이 기록되어 있다. 의궤의 마지막 부분에는 도감의 핵심 인물의 수결이 적혀 있다. 도제조 행판중추부사 김(金:김약로)의 수결을 비롯하여, 제조 한성판윤 박(朴:박문수)의 수결, 도청 공조판서 원(元:원경하)과 부사과 홍(洪:홍낙성)의 수결, 낭청 통례원 인의 임(任:임과)의 수결이 표시되어 있어서 당대에 이들이 사용한 서명을 확인할 수가 있다. 『의소세손묘소도감의궤』는 조선왕실에서 흔치 않는 세손의 묘소 조성에 관한 의궤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으며, 조선왕실 문화사 연구에 도움을 준다. 특히 왕릉의 조성에 비해 격을 낮춘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왕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와 비교 연구를 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작성자: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