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494호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4.용사잡록
(鄭琢 文籍 - 藥圃遺稿 및 古文書 - 龍蛇雜錄)

《용사잡록(龍蛇雜錄)》은 정탁(鄭琢, 1526∼1605)이 임진왜란 관계의 상소문(上疏文)ㆍ차자(箚子)ㆍ왕(王)과의 문답, 서장(書狀)ㆍ유시문(諭示文)ㆍ패문(牌文), 보고서(報告書) 등 다른 사람의 각종 문건(文件)을 모은 친필본이다. 잡록(雜錄)이란 서명을 붙인 이유도 이러한 여러 문건을 모아서 장책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정탁의 자는 자정(子精)이고, 호는 약포(藥圃), 백곡(栢谷)이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본관은 청주(淸州)로 경북 예천(醴泉) 출신이며, 정이충(鄭以忠)의 아들로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유성룡(柳成龍)ㆍ구봉령(具鳳齡) 등과 교유하였다. 숙부인 정이청(鄭以淸)과 함께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명종 13년(1558) 과거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하위직을 거쳐 이조좌랑ㆍ응교(應敎)를 지냈다. 1581년에 대사헌에 올랐으나 정인홍(鄭仁弘)ㆍ박광옥(朴光玉)과 의견 대립이 생겨 이조참판에 전임되었으며, 이 해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후 우찬성을 거쳐 임진왜란 때는 좌찬성으로 선조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고, 왕세자인 광해군을 강계(江界)ㆍ영변(寧邊) 등으로 호종하였다. 우의정ㆍ좌의정ㆍ판중추부사ㆍ영중추부사를 거쳐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原君)에 봉해졌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선조 38년(1605)에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정간(貞簡)이라는 시호가 붙여졌으며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되었다. 그는 곽재우(郭再祐)ㆍ김덕령(金德齡)ㆍ이순신(李舜臣) 등 명장을 발탁하여 임진왜란 동안 역량을 발휘하게 하였으며,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상수(象數)ㆍ병법(兵法)에도 능통하였다. 저서에 《약포집(藥圃集)》이 있다. 본 책의 내용은 조(朝)ㆍ명(明) 관련 문건, 조(朝)ㆍ일(日) 관련 문건, 명(明)ㆍ일(日) 관련 문건, 조선(朝鮮)만의 단독 문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각 문건들은 대체적으로 연월일(年月日)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선후가 바뀐 부분도 약간 있다. 이런 것은 문건을 접하는 대로 기록하다 보니 순서가 뒤바뀐 것으로 보일 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정탁의 노력으로 수습된 이 자료집은 《용만문견록(龍彎聞見錄)》《임진기록(壬辰記錄)》과 중복되는 것이 없으며, 이들과 함께 임진왜란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정암(李廷馣)과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 한효순(韓孝純)의 보고문은 다른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로서 왜란초기 양남지방(兩南地方)의 창의기병(倡義起兵)과 활약상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어 당시의 사회상을 밝히는 좋은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