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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

위암장지연선생의묘 (偉庵張志淵先生의墓)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3.12.20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사단법인 장지연선생 기념사업회
해제일 2011.04.06

근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이며 우국지사였던 위암(韋庵) 장지연(1864∼1921) 선생의 묘이다.

고종 32년(1895)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항일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글을 지었고, 1896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의 간섭이 커지자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남궁억·유근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고, 이상재·이승만 등과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국권침탈 조약을 폭로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국민에게 호소하는 글을 써 투옥되었다. 1906년 출옥한 후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본격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신문과 잡지에 논설을 실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시켰으며 전국민이 합심하여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 뒤 대한자강회가 강제해산되자 대한협회에서 활동하다가 1908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해조신문을 집필하였다. 계속해서 중국 각지를 유람하다 귀국 후 진주의 경남일보 주필이 되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언론구국운동을 계속하다가 폐간되어 활동 무대를 잃게 되었다.

위암 장지연(1864∼1921)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의 국권침탈과 을사오적을 규탄하여 온 국민의 신망을 받은 인물이며 그의 이러한 공적으로 인해 그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고 근세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소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14년 이후 그의 행적은 언론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거나 협조를 부추기는 논조로 일관된 사실이 2000년대 이후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 기구에서 뿐 아니라 국가차원의 조사에서도 확인되어 2011년 4월 6일 장지연에게 서훈되었던 건국훈장 독립장이 공식적으로 취소되었다. 따라서, 1983년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 역시 그의 공로에 대한 잘못된 정보에 의한 것이었음이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국가차원에서 확인된 사실을 인정하여 “위암 장지연 선생의 묘”에 대한 문화재자료 지정을 해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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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세 문 의 : 경상남도 창원시 문화예술과 055-225-3673~36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