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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37호

마포 최사영 가옥 (麻浦 崔思永 家屋)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면적 건물 1棟, 토지 153㎡
지정(등록)일 2007.05.30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9-21
시 대 대한제국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이 고택(古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 1897년~1910년)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금융업·창고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해 재력가로도 널리 알려진 최사영(崔思永)이 1906년 마포(麻浦)에 건립한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자인 최사영은 동 가옥 건립 이전부터 삼개(마포동 236번지)에 거주하면서 지역 유지(有志) 또는 신사(紳士)로서 1920년대 후반까지 생존,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품계가 정3품까지 올랐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을 지냈으며, 국권 상실 직전인 1910년 8월 26일에는 6등(六等)으로 서훈(敍勳)되어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그는 경제적 활동도 활발히 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陳田)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고, 일제 초기인 1911년에는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지역 유지로서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활발히 한 사실들이 당시의 여러 사료들에서 확인되고 있는 바 국권 상실 전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도 했고, 국권 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 유지로서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했다.

최사영은 이 집을 1906년 건립하여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건립연대는 건물 종도리에 쓰여 있는 ‘大韓光武十年丙午七月十七日甲時竪柱上樑’이라는 명문(銘文)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최사영 거주 이후 이 집은 최성렬(崔星烈 또는 崔聖烈)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941년에는 다시 마쯔시마(松島益榮)에게로 이전되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에 김형종(金炯鍾), 1947년에 이윤영(李胤永), 1971년 한국신탁은행, 1974년 이종승(李鍾勝), 1980년 이을순, 1999년 코리아 프로덕트, 2001년 김정의·정기택 등으로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최사영에 의해 세워진 이 집은『경성부관내지적목록(京城府管內地籍目錄)』및 폐쇄 토지대장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는 407평(1,345.46㎡) 규모의 마포동 236번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46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토지 분할로 문화재 지정이 최초 검토되던 2001년 11월 당시에는 마포동 236-1번지(826.8㎡)에 본 건물 1동만 남아 있었다. 최사영에 의해 조성될 당시에는 본 건물 외에도 여러 동의 건물들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몇 동의 건물이 어떠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는지 현 시점에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그 가운데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의 ‘ㄱ’자형 오량가(五樑架) 목조(木造) 기와집이다. 두벌대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 위에 다듬은 네모뿔대 초석(礎石)을 두고 네모기둥〔方柱〕을 세워 오량가(五樑架)로 가구(架構)하였다. 도리가 둥근 형태의 굴도리집이다.

건물 평면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향우측으로는 안방을 배치하고 다시 안방의 남쪽으로 꺾어져 정면 2칸, 측면 2칸의 부엌을 배치하였다. 부엌 위에는 다락을 설치했다. 한편 대청마루의 향좌측(向左側)으로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건넌방을 배치하고 건넌방 옆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를 들였다.

궁궐 건축에서와 같이 대청 연등천장의 서까래 상부를 구조재와 동일한 재질의 골개판으로 막아 누수로 인한 지붕부 목재 훼손이 덜하도록 한 점, 대청마루 앞뒤로 각각 앞퇴와 뒤퇴를 두고 툇마루에 난간을 설치한 점, 그리고 부엌 출입문 용도의 판문과 그 양 옆의 판장벽, 머름과 머름 위 살창, 부엌 위 고창의 넌출창호, 부엌 선반을 받치고 있는 당초무늬 낙양 형태의 까치발 등이 한 데 조화를 이루도록 부엌 입면이 구성되도록 한 점 등은 서울 지역 다른 일반 사대부 가옥과 구별되는 이 건물만의 특징들이다.

이 집은 2001년 소유권 변동 과정에서 멸실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01. 11. 27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가지정(假指定), 보존된 후 2002. 3. 20 개최된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 심의에서 이축 가결되어 2003년~2007년 한국가구박물관에 의해 현 부지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고택은 마포에 위치할 당시부터 이 건물을 포함한 집의 전체 배치형태가 불확실했고, 건물 자체도 이미 일부가 변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되면서 다시 일부 변형되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까지 지정하기 어렵지만 건물 자체의 조형과 부재의 가공이 전체적으로 뛰어나고, 특히 부엌 외벽 의장의 짜임새와 장식이 아주 우수하여 당시 서울지역 최상위 계층 가옥의 조성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이 고택(古宅)은 대한제국(大韓帝國 : 1897년~1910년) 시기의 관료로서 광업·금융업·창고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해 재력가로도 널리 알려진 최사영(崔思永)이 1906년 마포(麻浦)에 건립한 집의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이 건물의 건립자인 최사영은 동 가옥 건립 이전부터 삼개(마포동 236번지)에 거주하면서 지역 유지(有志) 또는 신사(紳士)로서 1920년대 후반까지 생존, 활동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품계가 정3품까지 올랐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회에 해당하는 중추원(中樞院)의 의관(議官)을 지냈으며, 국권 상실 직전인 1910년 8월 26일에는 6등(六等)으로 서훈(敍勳)되어 태극장(太極章)을 받기도 했다. 그는 경제적 활동도 활발히 하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미 금광업이나 금융업·창고업·진전(陳田) 개간 등 각종 사업에 참여해 부를 축적하였고, 일제 초기인 1911년에는 전국에서 50만 원 이상 자산을 소유한 한국인 32명 중 한 명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편 지역 유지로서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활동을 활발히 한 사실들이 당시의 여러 사료들에서 확인되고 있는 바 국권 상실 전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 애국계몽운동 단체나 보성 소학교 등 학교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기도 했고, 국권 상실 후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한 독립운동가 가족을 돕거나 지역 유지로서 수해를 당한 지역 주민들의 구호에도 솔선수범했다.

최사영은 이 집을 1906년 건립하여 1929년까지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건립연대는 건물 종도리에 쓰여 있는 ‘大韓光武十年丙午七月十七日甲時竪柱上樑’이라는 명문(銘文)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최사영 거주 이후 이 집은 최성렬(崔星烈 또는 崔聖烈)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1941년에는 다시 마쯔시마(松島益榮)에게로 이전되었다가 광복 이후 1946년에 김형종(金炯鍾), 1947년에 이윤영(李胤永), 1971년 한국신탁은행, 1974년 이종승(李鍾勝), 1980년 이을순, 1999년 코리아 프로덕트, 2001년 김정의·정기택 등으로 여러 차례 변화하였다.

이와 같이 최사영에 의해 세워진 이 집은『경성부관내지적목록(京城府管內地籍目錄)』및 폐쇄 토지대장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는 407평(1,345.46㎡) 규모의 마포동 236번지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1946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토지 분할로 문화재 지정이 최초 검토되던 2001년 11월 당시에는 마포동 236-1번지(826.8㎡)에 본 건물 1동만 남아 있었다. 최사영에 의해 조성될 당시에는 본 건물 외에도 여러 동의 건물들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몇 동의 건물이 어떠한 배치형태를 이루고 있었는지 현 시점에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그 가운데 안채로 추정되는 건물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의 ‘ㄱ’자형 오량가(五樑架) 목조(木造) 기와집이다. 두벌대 장대석(長臺石) 기단(基壇) 위에 다듬은 네모뿔대 초석(礎石)을 두고 네모기둥〔方柱〕을 세워 오량가(五樑架)로 가구(架構)하였다. 도리가 둥근 형태의 굴도리집이다.

건물 평면을 보면 건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향우측으로는 안방을 배치하고 다시 안방의 남쪽으로 꺾어져 정면 2칸, 측면 2칸의 부엌을 배치하였다. 부엌 위에는 다락을 설치했다. 한편 대청마루의 향좌측(向左側)으로는 정면 1칸, 측면 2칸의 건넌방을 배치하고 건넌방 옆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누마루를 들였다.

궁궐 건축에서와 같이 대청 연등천장의 서까래 상부를 구조재와 동일한 재질의 골개판으로 막아 누수로 인한 지붕부 목재 훼손이 덜하도록 한 점, 대청마루 앞뒤로 각각 앞퇴와 뒤퇴를 두고 툇마루에 난간을 설치한 점, 그리고 부엌 출입문 용도의 판문과 그 양 옆의 판장벽, 머름과 머름 위 살창, 부엌 위 고창의 넌출창호, 부엌 선반을 받치고 있는 당초무늬 낙양 형태의 까치발 등이 한 데 조화를 이루도록 부엌 입면이 구성되도록 한 점 등은 서울 지역 다른 일반 사대부 가옥과 구별되는 이 건물만의 특징들이다.

이 집은 2001년 소유권 변동 과정에서 멸실 위기에 처하게 되자 2001. 11. 27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 가지정(假指定), 보존된 후 2002. 3. 20 개최된 서울특별시 문화재위원회의 현상변경 허가 심의에서 이축 가결되어 2003년~2007년 한국가구박물관에 의해 현 부지 안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고택은 마포에 위치할 당시부터 이 건물을 포함한 집의 전체 배치형태가 불확실했고, 건물 자체도 이미 일부가 변형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 위치로 이전, 복원되면서 다시 일부 변형되었기 때문에 서울특별시 민속자료로까지 지정하기 어렵지만 건물 자체의 조형과 부재의 가공이 전체적으로 뛰어나고, 특히 부엌 외벽 의장의 짜임새와 장식이 아주 우수하여 당시 서울지역 최상위 계층 가옥의 조성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므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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