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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

지포김구선생묘역일원 (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봉토묘
수량/면적 일원
지정(등록)일 2009.10.23
소 재 지 전라북도 부안군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전라북도 부안군 문화관광과 063-580-4388

김구(金丘 1211~1278)선생은 고려시대 인물로서, 본관은 부안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김구는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그의 학문과 공적을 기리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0년이 지난 고종 19년(1233)인 22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고, 정원부 사록에서부터 제주판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또한 수찬관, 정당문학, 참지정사, 지공거,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었고, 원의 몽고군 침입시에는 탁월한 지략과 화려한 변려문체의 표문으로 이를 막아냈으며, 원나라 최고의 문장가 왕악이 감탄할 정도로 문장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당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며,『고려사』열전 권 제19에 실릴 만큼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는 원나라에 갔을 때 남긴『북정록 北征錄』과, 충렬왕의『용루집 龍樓集』에 시가 남겨져 있으며,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지포집』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34년(중종 29)에 부안 도동서원에 배향하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 묘는 부안군 변산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운산마을의 북동쪽 구릉 정상에서 서남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 평탄지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의 동쪽에 부안김씨 재실인 경지재(敬止齋)와 경지재 남서쪽에 신도비각안에 김구선생신도비가 있으며, 묘역에서 남쪽으로 1km 남짓 떨어진 지점인 운산마을 입구에는 ‘부령김문정공묘동(扶寧金文貞公墓洞)’이라는 묘역 입구 안내 표지석이 있다.

묘역의 남쪽부분과 동쪽 부분 등의 일부는 석축을 쌓았는데 상면에는 철책을 둘렀으며 동쪽에는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봉분 아래에는 상석과 좌우에 묘비가 있으며 서남방에는 제단이 있다. 전면에는 양과 문인석상, 망주석이 각각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묘역의 중앙에 자리한 묘는 봉분의 직경이 7m 내외로서 그 하단부에 20~30cm 크기의 판석형 석재로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전면은 난간을 시설해 놓았다. 묘를 중심으로 전면에 석상과 향로석, 비석, 석양, 석인상(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조물과 후면에 토지신위의 제단이 있다. 1쌍의 문인석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거의 비슷한 형태로 조각하였다. 대체적으로 사각주에 가까운 석재에 조각하여 양감은 떨어진다. 머리에는 금관을 쓴 것으로 판단되며, 어깨가 귀 아래까지 올라 붙어 목이 표현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얼굴에서 눈과 코는 비교적 큰 형태를 보이며, 입술을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홀을 쥐고 있는 표현이지만 선명하지 않다. 조복의 넓은 소매는 무릎 아래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1쌍의 망주석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상부장식으로부터 기단까지 1매석으로 이루어졌다. 맨 위에는 보주형에 가까운 둥근 머리를 올렸으며, 아래는 앙련을 문양장식 없이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받침이 있다. 그 아래에 2단의 팔각기둥과 함께 팔각의 지대석을 조각하였다. 토지신단석과 제단 앞의 향로받침석은 문인석과 같은 시기의 석물로 판단되는데 묘의 북쪽의 토지신단석은 상석과 향로받침석이 남아 있는데 상석전면에 ‘토지신위’라는 명문이 있다.

김구(金丘 1211~1278)선생은 고려시대 인물로서, 본관은 부안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김구는 고려 충렬왕 4년(1278)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그의 학문과 공적을 기리어 문정(文貞)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0년이 지난 고종 19년(1233)인 22살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고, 정원부 사록에서부터 제주판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또한 수찬관, 정당문학, 참지정사, 지공거, 중서시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었고, 원의 몽고군 침입시에는 탁월한 지략과 화려한 변려문체의 표문으로 이를 막아냈으며, 원나라 최고의 문장가 왕악이 감탄할 정도로 문장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당대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이며,『고려사』열전 권 제19에 실릴 만큼 중요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남긴 기록으로는 원나라에 갔을 때 남긴『북정록 北征錄』과, 충렬왕의『용루집 龍樓集』에 시가 남겨져 있으며, 특히 변려문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지포집』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534년(중종 29)에 부안 도동서원에 배향하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 묘는 부안군 변산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2km 가량 떨어진 운산마을의 북동쪽 구릉 정상에서 서남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 평탄지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의 동쪽에 부안김씨 재실인 경지재(敬止齋)와 경지재 남서쪽에 신도비각안에 김구선생신도비가 있으며, 묘역에서 남쪽으로 1km 남짓 떨어진 지점인 운산마을 입구에는 ‘부령김문정공묘동(扶寧金文貞公墓洞)’이라는 묘역 입구 안내 표지석이 있다.

묘역의 남쪽부분과 동쪽 부분 등의 일부는 석축을 쌓았는데 상면에는 철책을 둘렀으며 동쪽에는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봉분 아래에는 상석과 좌우에 묘비가 있으며 서남방에는 제단이 있다. 전면에는 양과 문인석상, 망주석이 각각 마주보고 있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묘역의 중앙에 자리한 묘는 봉분의 직경이 7m 내외로서 그 하단부에 20~30cm 크기의 판석형 석재로 호석을 둘러 놓았으며 전면은 난간을 시설해 놓았다. 묘를 중심으로 전면에 석상과 향로석, 비석, 석양, 석인상(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조물과 후면에 토지신위의 제단이 있다. 1쌍의 문인석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거의 비슷한 형태로 조각하였다. 대체적으로 사각주에 가까운 석재에 조각하여 양감은 떨어진다. 머리에는 금관을 쓴 것으로 판단되며, 어깨가 귀 아래까지 올라 붙어 목이 표현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얼굴에서 눈과 코는 비교적 큰 형태를 보이며, 입술을 두툼하게 표현되었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홀을 쥐고 있는 표현이지만 선명하지 않다. 조복의 넓은 소매는 무릎 아래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1쌍의 망주석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상부장식으로부터 기단까지 1매석으로 이루어졌다. 맨 위에는 보주형에 가까운 둥근 머리를 올렸으며, 아래는 앙련을 문양장식 없이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받침이 있다. 그 아래에 2단의 팔각기둥과 함께 팔각의 지대석을 조각하였다. 토지신단석과 제단 앞의 향로받침석은 문인석과 같은 시기의 석물로 판단되는데 묘의 북쪽의 토지신단석은 상석과 향로받침석이 남아 있는데 상석전면에 ‘토지신위’라는 명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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