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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4호

화의군이영묘역 (和義君 李瓔 墓域)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수량/면적 분묘 1基, 석물 10基, 토지 265㎡
지정(등록)일 2005.12.08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서울특별시 은평구 문화관광과 02-351-6522

이 묘역은 조선 제 4대 왕인 세종(成宗)의 아들로 단종(端宗)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세조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1425년∼ 1489년 이후)의 분묘가 자리한 곳이다.

화의군 이영은 1425년(세종 7) 조선 제 4대왕 세종(世宗)의 여섯 번째 아들(庶 1男)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후에 박중손(朴仲孫)의 사위가 되었다.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의 매부이기도 하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 등과 결탁하여 국기(國基)를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外方)에 부처되었다가 1456년 사면되고, 같은 해 상왕(上王:단종)복위사건에 참가한 뒤에 가산(家産)을 적몰당하고 고신(告身)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 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단종)이 교살(絞殺)되자 화의군도 이에 연루되어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정종(鄭悰)등과 함께 금방(禁防)되었다.

성종대왕실록(成宗大王實錄)에는 화의군 이영이 1482년(성종 13) 특전을 받아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고, 1484년(성종 15)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경외종편(京外從便)되었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65세가 된 화의군이 자신의 죄에 연루되어 서민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서자를 종실의 일원으로 거두어 달라고 상서(上書)하자 성종이 조정의 논의를 거쳐 이영의 자손을 천역(賤役)에서 면해 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금산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36세를 일기로 순절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의군(和義君)은 학문에 조예가 깊고 절의가 있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사육신과 함께 종친 중 절의가 깊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한남군 이어(漢南 君 李?)・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하령군 이양(河寧君 李穰) 등과 함께 정조 때는 육종영(六宗英) 중 한 분으로 거론되어졌고, 조정의 논의를 거쳐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추향(追享) 되기도 했다.

이 묘역은 조선 제 4대 왕인 세종(成宗)의 아들로 단종(端宗)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세조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1425년∼ 1489년 이후)의 분묘가 자리한 곳이다.

화의군 이영은 1425년(세종 7) 조선 제 4대왕 세종(世宗)의 여섯 번째 아들(庶 1男)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후에 박중손(朴仲孫)의 사위가 되었다.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의 매부이기도 하다. 1433년(세종 15)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면서 대간(臺諫)으로부터 금성대군(錦城大君)・혜빈양씨(惠嬪楊氏) 등과 결탁하여 국기(國基)를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外方)에 부처되었다가 1456년 사면되고, 같은 해 상왕(上王:단종)복위사건에 참가한 뒤에 가산(家産)을 적몰당하고 고신(告身)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 되었다. 1457년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였다가 사사(賜死)되고 영월에 방출된 노산군(魯山君:단종)이 교살(絞殺)되자 화의군도 이에 연루되어 한남군 이어(漢南君 李?)・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정종(鄭悰)등과 함께 금방(禁防)되었다.

성종대왕실록(成宗大王實錄)에는 화의군 이영이 1482년(성종 13) 특전을 받아 외방종편(外方從便)되었고, 1484년(성종 15)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유교(遺敎)에 따라 경외종편(京外從便)되었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65세가 된 화의군이 자신의 죄에 연루되어 서민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서자를 종실의 일원으로 거두어 달라고 상서(上書)하자 성종이 조정의 논의를 거쳐 이영의 자손을 천역(賤役)에서 면해 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금산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36세를 일기로 순절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화의군(和義君)은 학문에 조예가 깊고 절의가 있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사육신과 함께 종친 중 절의가 깊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금성대군 이유(錦城大君 李瑜)・한남군 이어(漢南 君 李?)・영풍군 이전(永豊君 李瑔)・하령군 이양(河寧君 李穰) 등과 함께 정조 때는 육종영(六宗英) 중 한 분으로 거론되어졌고, 조정의 논의를 거쳐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추향(追享)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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