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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기념물 제7호

부산진성 (釜山鎭城)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면적 24,198㎡
지정(등록)일 1972.06.26
소 재 지 부산 동구 자성로 99 (범일동)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동구 
시도지정 및 문화재자료는 각 지자체 담당부서에서 문화재정보를 입력·수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을 경우, 아래 지자체 담당부서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 상 세 문 의 : 부산광역시 동구 문화체육관광과 051-440-4064

부산진(釜山鎭)은 조선 태종 7년(1407) 낙동강의 동쪽지역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의 사령부로서 휘하 11개의 수군진성과 함께 동남해안의 방어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수군은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근무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성종 21년(1490) 병선의 정박처로서 수군과 물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둘레 2,026척(약 950m)의 부산진성(구 부산진성)을 증산(甑山) 아래에 쌓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첫 전투 때 부산진의 지휘관인 첨사(僉使) 정발(鄭撥)을 비롯한 군사와 백성들이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부산진성을 허물고 증산 정상에 본성(本城)인 증산왜성(倭城)을 쌓았다. 또한 동남쪽 해안가에는 본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성支城: 원래의 성 밖에 보조로 쌓은 성,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40년(1607) 조선 수군은 자성대왜성으로 진영(鎭營)을 옮겨 부산진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부산진성의 규모는 둘레 1,791보 4척(약 2.4㎞)로 여첩 (女堞, 성벽 위 담장시설) 483타(垜)가 있었고, 동서남북에는 문루(門樓): 성문 위에 세운 높은 집 또는 다락를 두었는데 각각 진동문(鎭東門), 금루관(金壘關), 진남문(鎭南門), 구장루(龜藏樓)라 불렀다. 그리고 성내 정상에는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 만세덕(萬世德)을 추모하는 만공단(萬公壇)이 조성되었고, 서북쪽 외성(外城) 공간에는 객사인 공진관(拱辰館)과 부속건물, 동남쪽 내성(內城) 공간에는 관아(官衙)를 비롯한 부속건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비 계획에 따라 성을 철거하면서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는데, 1974년 부산진성 정화 공사로 동문인 건춘문(建春文,구 진동문), 서문인 금루관,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가 복원되었다. 현재는 자성대공원 내 당시 자성대(子城臺)라고 부르던 일본식 성벽과 장대(將臺)인 진남대(鎭南臺), 그리고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의 장군 천만리(千萬里)의 후손이 세운‘천만리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가 남아있다. 동문 서쪽에는 고려 말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운 최영 장군을 기리는 비각(碑閣): 비를 세우고 그 위를 덮어 지은 집이 보존되어 있다.

부산진성은 조선수군의 5백년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쌓은 왜성과 이후 왜성을 이용한 조선 후기 수군진성에 대한 연구 자료로서도 그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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