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홈으로첫번째 분류

  • 인쇄

사적 제513호

나주 반남 고분군 (羅州 潘南 古墳群)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고분군
수량/면적 121,425㎡
지정(등록)일 2011.07.28
소 재 지 전남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 103 등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 나주시

반남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고대문화의 꽃을 피운 곳으로 자미산을 중심에 두고 약 40여기의 고분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이다. 이른 시기의 옹관고분은 지면을 약간 파고 옹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분구를 쌓았으나 후대에는 분구를 쌓은 후 정상부에 흙을 되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고 분구의 규모도 커진다. 이처럼 옹관을 묘제로 사용하는 형식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며, 한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묘제의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며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대안리 일대에는 12기가 분포하는데 제9호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는데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 고분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이때 금동관(국보 제295호)을 비롯한 금동 신발, 금반지,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구리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 신촌리 9호분을 재발굴조사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 토기 32개가 출토되었다. 원통형 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교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심 축조연대는 신촌리, 대안리와 유사한 5세기 중엽~후반경으로 판단된다. 반남 고분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10호분은 석실분으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 세력이 진출하면서 토착세력의 옹관묘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Bannam was an area along the Sampogang River where ancient cultures flourished. Around forty ancient tombs were discovered in the area (i.e. Daean-ri, Sinchon-ri, and Deoksan-ri during excavations carried out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1910-1945). Diverse relics have been unearthed from the tombs, such as unique large-sized jar coffins unlike any others found elsewhere in the country, and objects that display the status of the ruling class, such as gilt-bronze crown and shoes, and a sword with ring pommel and phoenix design. Jar coffin tombs are found only in areas along the Yeongsangang River, and are markedly different from the stone mound tombs of Goguryeo, the stone chamber tombs of Baekje and Gaya, and the wooden coffin tombs with stone mound of Silla. In the early period, such tombs were formed by burying about half of a jar coffin in a hole and then building a mound over it. Later, the mound was formed first and then the jar coffin was placed into a hole made at the top of the mound. Over time, larger mounds were also built. This style of jar coffin tomb was adopted in many areas around the world. In Korea, the practice appears to have been adopted during the Neolithic Age. As large jar coffins appear not to have been used elsewhere, this tomb system is thought to have been influenced by people in areas along the Yeongsangang River. Nine jar coffins, along with gold rings, large swords, bronze bracelets, glass beads, and potteries were unearthed from Tomb No. 9 in Daean-ri, which is the largest of the twelve tombs in the area. Nine jar coffin tombs are located in Sinchon-ri. Some of the tombs, including Tomb No. 9, were excavated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1910-1945), yielding a Gilt-bronze Crown (National Treasure No. 295) and shoes, gold rings, a sword with ring pommel and phoenix design, and bronze bracelets. During the excavation of Tomb No. 9 in Sinchon-ri in 1999, thirty-two cylinder-shaped pottery items, eventually found to be associated with the Haniwa (terracotta clay figures unearthed from ancient tombs) of Japan, were found around the top. This provides important clues for studying exchanges between Baekje and Japan in the ancient period. More than fourteen tombs are located in Deoksan-ri, which are thought to date back to the mid- to late-5th century, like those in Sinchon-ri and Daean-ri. Tomb No. 10 in Deoksan-ri, which dates from the latest period among those found in Bannam-myeon, is a stone chamber tomb. It is thought to have been made at a moment in the mid-6th century or perhaps a bit later, when the ruling class of the area fell under the domination of Baekje, resulting in the discontinuation of jar coffin tombs.

반남은 영산강 지류인 삼포강을 중심으로 고대문화의 꽃을 피운 곳으로 자미산을 중심에 두고 약 40여기의 고분이 대안리, 신촌리, 덕산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진 이 고분군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대형옹관과 함께 금동관, 금동신발,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등 최고 권력자의 위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옹관고분은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실분, 신라의 적석목곽분, 가야의 석곽묘 등과 달리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던 독특한 묘제이다. 이른 시기의 옹관고분은 지면을 약간 파고 옹을 반쯤 안치한 후 그 위에 낮은 분구를 쌓았으나 후대에는 분구를 쌓은 후 정상부에 흙을 되파고 옹관을 안치하였고 분구의 규모도 커진다. 이처럼 옹관을 묘제로 사용하는 형식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며, 한국에서도 신석기시대부터 묘제의 일부로 사용하던 것이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의 옹관고분처럼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며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의해 완성된 묘제로 이해되고 있다.

대안리 일대에는 12기가 분포하는데 제9호분은 대안리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이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촌리 일대에는 9기가 분포하는데 일제강점기에 9호분 등 고분 일부가 발굴되었으며 이때 금동관(국보 제295호)을 비롯한 금동 신발, 금반지, 봉황문 고리자루칼(환두대도), 구리팔찌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1999년 신촌리 9호분을 재발굴조사한 결과, 고분 정상부를 두르며 장식한 원통형 토기 32개가 출토되었다. 원통형 토기는 일본의 고분에서 출토된 ‘하니와’라는 유물과 같은 성격으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 교류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덕산리 일대에는 14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으며 중심 축조연대는 신촌리, 대안리와 유사한 5세기 중엽~후반경으로 판단된다. 반남 고분군 가운데 가장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10호분은 석실분으로 6세기 중엽 이후 백제 세력이 진출하면서 토착세력의 옹관묘가 소멸되는 과정에서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내레이션

  • 한국어
  • 영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