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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436호

서울 선농단 (서울 先農壇)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수량/면적 3,933㎡
지정(등록)일 2001.12.29
소 재 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274-1번지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동대문구 
관리자(관리단체) 동대문구 
문화재 담당부서 : 보존정책과- 상세문의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삼국 신라시대 때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이미 농사의 삼신(三神), 즉 선농과 중농, 후농에 제사를 지내는 등 선농제향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선농제는 행해졌는데 중국 의식을 따라 정월 해일에 적전(籍田)에서 신농씨와 후직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종 2년(983) 정월 신미일에는 환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같은 달 을해일에 적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불교나 팔관회와 같은 고유 전통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이 시대의 선농제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에 의거한 선농제가 국가의 주요 전례(典禮)가 되었고 그 의미도 강화되었다. 태종은 선농제의 제향일을 정월 길(吉) 해일에서 경칩 이후 길한 해일로 바꿔 거행하고 친경의계를 제정하였다. 중농․후농제를 폐지하고 대신 삼신을 대표하는 선농제만 모셨다. 태조 1년(1392)에는 한양 근교에 왕이 친경(親耕)하는 전지(田地)인 동적전을 설치하고 경작하였으며 이를 관장하여 경작과 수확을 살피는 고직인 적정령이 내려지고 승(丞)이 설치되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과 유의 설치 규정이 마련되었다. 세종 재위 당시에는 친향선농의와 친경의주를 제정하고 《국조의례의》, 《길례》에 선농단과 경작에 대한 의식을 규정하였다. 성종은 《국조오례의》의 친경의례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성종 7년(1476)에는 친경대를 신축하고 처음으로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영조 43년(1767)에는 친경의궤를 편찬하고 권농과 고례를 특히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순종 3년(1909)에는 사직단으로 위패가 옮겨지고 선농단 일원이 국유화되면서 제향이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선농단이 위치한 곳에 청량대(凊凉臺) 공원을 조성하고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세워 선농제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말살하였다.

폐지된 제향행사는 1979년에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선농단친목회에 의해 비로소 재개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인수받아 매년 선농제를 모시고 있다.




※(선농단 → 서울 선농단)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Seonnongdan is an altar dedicated to the worship of Shen Nung and Hou Ji, the mythical emperors of ancient China who introduced agriculture to the people. According to records, Seonnongdan goes as far back as Silla; in the succeeding Goryeo and Joseon Dynasties, the kings continued to hold a rite called Seonnongje at the altar to pray for good harvest. After the rite, the king would go to a ceremonial field named Jeokjeon to the south of the altar and plow the field himself as a gesture showing to the people the importance of agriculture and to promote farming in the country. Therefore, the altar is an important relic symbolic of Korea’s agriculture. This ceremony of the king plowing the field at the altar was last carried out in 1909 by Emperor Sunjong and was abolished under Japanese colonial rule. Today, only a four-square-meter stone wall remains of the altar.

先农坛是祭祀农业始祖古代中国帝王神农氏与后稷氏的场所。据记录,我国的先农祭始于三国新罗时代,此时已经有祭祀农业三神,即先农、中农与后农的先农祭享记录。日帝强制占领期之前,即纯宗三年(1909)牌位被搬到社稷坛,先农坛一带划为国有,祭享也随之被废止。后来日帝在先农坛所在地修建了清凉台公园和崇仁普通学校(今首尔钟岩小学),抹杀了先农祭的历史文化意义。被废止的祭享活动直到1979年才由当地居民组成的先农坛亲睦会重新举行。1992年起在交接给东大门区以后每年都要举行先农祭。

ソウル先農壇は人間に耕作の仕方を教えたという古代中国の帝王神農氏と后稷氏を主神として祭祀を行った所である。韓国での先農祭は三国新羅時代から行われたという記録がある。この時からすでに農業の三神、すなわち先農と中農、後農に祭祀を行うなどの「先農祭享」を行った記録が伝わっている。日帝強占期の直前である純宗3年(1909)に社稷壇に位牌が移され、ソウル先農壇一円が国有化されるに伴い祭享は廃止された。その後、日本は先農壇がある所に清凉台公園を造成し、崇仁普通学校(現、ソウル鍾岩小学校)を建てて先農祭の歴史・文化的意味を抹殺した。廃止された祭享行事は1979年、地域住民たちによって構成されたソウル先農壇親睦会によって初めて再開され、1992年からは東大門区で受け継いで毎年先農祭を行っている。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선농제는 삼국 신라시대 때부터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부터 이미 농사의 삼신(三神), 즉 선농과 중농, 후농에 제사를 지내는 등 선농제향을 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도 선농제는 행해졌는데 중국 의식을 따라 정월 해일에 적전(籍田)에서 신농씨와 후직에게 제사를 지냈다. 성종 2년(983) 정월 신미일에는 환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같은 달 을해일에 적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전반적으로 불교나 팔관회와 같은 고유 전통에 의존하는 바가 컸기 때문에 이 시대의 선농제는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 예법에 의거한 선농제가 국가의 주요 전례(典禮)가 되었고 그 의미도 강화되었다. 태종은 선농제의 제향일을 정월 길(吉) 해일에서 경칩 이후 길한 해일로 바꿔 거행하고 친경의계를 제정하였다. 중농․후농제를 폐지하고 대신 삼신을 대표하는 선농제만 모셨다. 태조 1년(1392)에는 한양 근교에 왕이 친경(親耕)하는 전지(田地)인 동적전을 설치하고 경작하였으며 이를 관장하여 경작과 수확을 살피는 고직인 적정령이 내려지고 승(丞)이 설치되었다. 태종 14년(1414)에는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과 유의 설치 규정이 마련되었다. 세종 재위 당시에는 친향선농의와 친경의주를 제정하고 《국조의례의》, 《길례》에 선농단과 경작에 대한 의식을 규정하였다. 성종은 《국조오례의》의 친경의례의 내용을 수정 보완하였으며 성종 7년(1476)에는 친경대를 신축하고 처음으로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영조 43년(1767)에는 친경의궤를 편찬하고 권농과 고례를 특히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제강점기 직전인 순종 3년(1909)에는 사직단으로 위패가 옮겨지고 선농단 일원이 국유화되면서 제향이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선농단이 위치한 곳에 청량대(凊凉臺) 공원을 조성하고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세워 선농제의 역사․문화적 의미를 말살하였다.

폐지된 제향행사는 1979년에 지역주민으로 구성된 선농단친목회에 의해 비로소 재개되었으며 1992년부터는 동대문구에서 인수받아 매년 선농제를 모시고 있다.




※(선농단 → 서울 선농단)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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