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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9호

서울 선릉과 정릉 (서울 宣陵과 靖陵)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수량/면적 240,589㎡
지정(등록)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강남구 선릉로100길 1 (삼성동)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문화재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
관리자(관리단체) 문화재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
문화재 담당부서 : 중부지구관리소- 상세문의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두번째 왕비(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번째 왕비(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Seolleung is the place where the graves of King Seongjong, the ninth king of Joseon, and his wife, Queen Jeonghyeon, are buried. King Seongjong devoted his reign to realizing the ideal politics led by an authoritative king and stabilizing the politics of early Joseon by utilizing Confucianism as well as the academe. In Seolleung, the king's and queen's tombs are separated, forming different ridges. The left ridge, where the queen's grave is placed, does not have a stone screen behind. Other stone sculptures are arranged as in the king's tomb according to the book of national ritual guidance. The king's ridge has a twelve-sided stone-screen engraved with the twelve zodiac animal deities in a human body and the stone screen that used to be omitted according to King Sejo's will. Other stone sculptures such as those of the civil vassals stand outside the balustrade. The sculptures of the civil and military vassals look so real in terms of the face but do not have any cubic effect in the body. This is Jeongneung where King Jungjong, the eleventh king of Joseon, is buried. King Jungjong had striven to correct the wrong politics led by Prince Yeonsan but failed following the heated argument between the reformists and the loyalists. Originally, Jeongneung was located on the right side of the tomb of King Jungjong's wife, Queen Janggyeong, but was moved to its current location at the advice of Queen Munjeong, King Jungjong's wife after Queen Janggyeong, i.e., the original location was inauspicious based on geomancy beliefs. Currently, the tomb is located at a very low-lying ground such that it requires special care during floods. The stone sculptures around the tomb were made after those in Seonneung, the tombs of King Seonjong and his wife. This is one of the three royal tombs where only the king without his wife is placed. The other two cases are that of King Taejo, the founding father of Joseon, and that of King Danjong, whose tomb was recognized as that of a king after he was unseated and killed.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both tombs, Seolleung and Jeongneung, were severely damaged. The room for memorial service lies between two tombs and layers used for protection from submersion. Such structure constitutes one of the distinctive characteristics of Jeongneung and Seonneung. Only related officers were allowed in the area of the royal tomb, but the Japanese colonial rule permitted the commoner to cultivate the low-lying ground and even that between two tombs. Due to the cultivation, those woods around the tombs were cut off. After the Korean War, the cultivation around the area by the commoner was accelerated, and farmland reform by the Korean government classified the area as a private farm. As Seoul started expanding in 1960, the city launched the land readjustment project in the 1970s, accelerating the transformation of the area of the royal tombs as a residential area.

宣陵是第九代成宗及夫人贞显王后的墓地。成宗为了发扬儒教思想及实现王道政治,努力培养士林来牵制守旧势力、巩固政治基础,稳定了朝鲜初期的体制。宣陵采用王陵与妃陵位于不同山脊上的同原异冈形式,左侧山脊上的妃陵未设屏石,其他石物与王陵相同,依照《国朝五礼仪》修建。王陵立有12面屏风石,石头上刻着有兽面人身的十二支神像,世祖光陵以后一度消失的屏石到了成宗宣陵时期又开始重现。栏杆石为12间,此外还有石羊·石虎·望柱石·文人石像等石物。文·武人像的脸部描写非常真实,但身体缺乏立体感。靖陵是11代中宗的墓地。中宗为了纠正燕山君的错误政治百般努力,但改革派与功臣派之间政治争端不息,朝政不稳。靖陵原本位于中宗第一继妃章敬王后的墓地禧陵的右侧山坡。后因第二继妃文定王后尹氏认为靖陵属于风水地理上的不祥之兆,遂把王陵迁移到现在的位置。陵墓周边的石物效仿了宣陵的石物制度。朝鲜王陵中仅葬国王的陵墓除了后世成为王陵的端宗庄陵以外,仅有太祖的健元陵与中宗的靖陵。壬辰倭乱时期宣·靖陵两座王陵惨遭毁损。祭祀堂位于两陵之间,为了避免夏季浸水而建在阶地上的王陵仅有宣陵和靖陵。

宣陵は朝鮮時代第9代成宗と妃貞顕王后の墓である。成宗は儒教思想を定着させ、王道政治を実現するために士林を成長させて勳旧勢力を牽制し、政治的な基盤を強化することで朝鮮初期の全般的な体制を安定させた。宣陵は王陵と王妃陵がそれぞれ別の尾根にある同原異岡の形式で、左の尾根の王妃陵には屏風石を立てなかった。他の石造物は王陵と同じで、『国朝五礼儀』に従っている。王陵には12面の屏風石を立て、そこには動物の頭に人の形をした十二支神像を刻み、世祖の光陵以降立てなかった屏風石を成宗の宣陵の時から再び立てた。欄干石は12間で、その他に羊石・虎石・望柱石・文人石などの石造物がある。文・武人石の顔は写実的な手法で表現されたが、胴体は立体感が欠けている。靖陵は朝鮮時代第11代中宗の墓である。中宗は燕山君の誤った政治を正そうと努めたが、改革派と功臣派の政治的な論争が絶えず、朝廷は安定しなかった。靖陵は元々中宗の第1継妃・章敬王后の墓である禧陵の右側の丘にあったが、第2継妃・文定王后尹氏が風水説に基づいて不吉だと言ったため現在の所に移した。墓の周辺の石造物は宣陵の方式に倣った。朝鮮の王陵の中で王だけが単独にいる墓は、後代に王陵になった端宗の荘陵を除けば、太祖の健元陵と中宗の靖陵しかない。壬辰倭乱の時にはソウル宣陵と靖陵の両陵が壊されたこともあった。祭祀を行なう部屋は両陵の間にあり、夏の浸水を防ぐために階段の上に建てたが、このような例は宣陵・靖陵だけである。

선릉은 9대 성종과 부인 정현왕후의 무덤이다.

성종은 유교사상을 정착하여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사림을 성장시켜 훈구세력을 견제하고, 정치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조선 초기의 전반적인 체제를 안정시켰다.

선릉은 왕릉과 비릉이 각각 다른 산등성이에 있는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비릉에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다른 석물들은 왕릉과 같으며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왕릉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우고 그안에 동물의 머리에 사람의 모습을 한 십이지신상을 새겼다. 난간석은 12칸이며 그 밖에 양석·호석·망주석·문석인 등의 석물이 있다.

정릉은 11대 중종의 무덤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위해 노력하였으나, 개혁파와 공신파의 정치적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정릉은 원래 중종의 두번째 왕비(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세번째 왕비(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선릉의 석물제도를 본떴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임진왜란 때는 선·정릉의 양릉이 훼손되는 변을 겪게 된다. 재실(齋室)은 양릉의 사이에 있으며, 여름철의 침수를 피하기 위해 층단에 지었는데 이러한 예는 선릉·정릉 뿐이다.




※(선릉·정릉 → 서울 선릉과 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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