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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7호

남양주 광릉 (南楊州 光陵)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수량/면적 1,040.399㎡
지정(등록)일 1970.05.26
소 재 지 경기도 남양주시 광릉수목원로 354 (진접읍, 광릉)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문화재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관리자(관리단체) 문화재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문화재 담당부서 : 동부지구관리소- 상세문의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석인·무석인·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구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This is a royal tomb called Gwangneung where King Sejo, the seventh king of Joseon, and Queen Jeonghui, his wife, are buried. He reigned from 1455 to 1468. As the second son, King Sejo unseated King Danjong, his young nephew, and reigned in 1455 after his brother, King Munjong, passed away. King Sejo had several accomplishments such as reforming the military and land systems and abolishing the academic institute, considered the source of empowering the vassals. Such accomplishments contributed to strengthening the authority of the king. He passed away in 1468 after suffering from disease. Queen Jeonghui is the first queen in Joseon to hold office in government on behalf of a young king. King Yejong and King Seongjong were too young to run the country. She passed away in the fourteen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gjong in 1483. Gwangneung is regarded as important in the system of royal tomb of Joseon. King Sejo left the will to abolish the stone screen and stone room by blocking it; thus contributing to decreasing the financial expenditure of the state and the burden of the people. Around the tomb are balustrades in stone surrounded by other stone sculptures. Twelve zodiac animal deities are engraved on the pillar of the balustrade to offset the absence of the screen stone. This appears only in Gwangneung. Later, 24 directions and other letters are added to the deity engraving. A new method of arranging royal tombs, called Dongwonigang, is applied here. Before the royal tomb of King Sejo and his wife, which introduced the way of putting two hills with graves under a t-shaped shrine, the method used in the tomb of the Great King Sejong and his wife and tombs from Goryeo had been popular. With the styles of royal tombs of Joseon accumulated in the tomb of the Great King Sejong, a turning point in their styles can be seen in King Sejo's tomb.

光陵是朝鲜第7代王世祖(在位1455∼1468)与夫人贞熹王后尹氏(1418∼1483)的陵墓。按照国王的遗言墓室未建石室而是使用石灰压实封阻,陵墓周围未修建屏风石。不设石房和屏风石等举措大大减轻了百姓的苦痛与国家的财政负担。墓地周边立有栏杆石,栏杆石室建有文人石像·武人石像·石床·望柱石·石护·石羊。因未立屏风石,所以在栏杆石的柱子上雕刻了十二支神像,这种方式仅光陵独此一例,用文字在栏杆石上表示,或后来刻上了24方位。陵墓布局也是最早的同原异冈形式。迄今为止,将国王与王妃的陵墓并排而列合葬国王与王妃时均采用了高丽显陵·靖陵式的双陵或者世宗与昭宪王后沈氏的英陵形式,而光陵却采用了将两座山坡汇拢为一座丁字阁的新颖布局,对后世的的陵墓制度产生了一定影响。若称世宗的英陵是朝鲜前期王陵制度的总结,那么光陵则是朝鲜前期王陵制度的一大创新,在朝鲜王陵制度上占据着举足轻重的位置。

光陵は朝鮮時代第7代世祖(在位1455~1468)とその妃の貞熹王后尹氏(1418~1483)の墓である。王の遺言に従って墓の部屋は石室を作る代わりに石灰で壁を作り、墓の周りには屏風石を立てないようにした。石室と屏風石をなくすことで国民の負担と国で使うお金を大きく減ら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墓の周りには欄干石を立て、その他に文人石・武人石・床石・望柱石・虎石・羊石を立てた。欄干石の柱には十二支神像を刻んだが、これは屏風石を立てなかったためである。このような例は光陵にしかなく、文字で欄干石に表示したり、後には24方位まで刻むようになった。墓の配置においても最初の同原異岡の形式である。つまり、これまでは王と王妃の墓を並んで建てる時には、高麗玄陵・正陵式の双陵もしくは世宗と昭憲王后沈氏の墓である英陵の形式のように、王と王妃を一緒に葬る方法を取ったが、光陵は二つの丘を一つの丁字閣で結ぶ新たな配置で、後世の墓制度に影響を及ぼした。世宗の英陵が朝鮮前期における王陵制度を総まとめしたものであるとすれば、南楊州光陵は朝鮮前期における王陵制度の一大変化をもたらしたものとして、朝鮮時代の王陵制度上重要な位置を占めている。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석인·무석인·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구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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