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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17호

경복궁 (景福宮)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수량/면적 432,703㎡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 1 (세종로)
시 대 조선 태조 4년(1395)
소유자(소유단체) 문화재청 
관리자(관리단체)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소 
문화재 담당부서 : 경복궁관리소- 상세문의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Gyeongbokgung Palace, the main palace in the Joseon Dynasty, was built after King Taejo,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He had the capital moved to Hanyang during the fourth year of his reign (1395). Its name, literally meaning “great fortune,” originated with a phrase of Sigyeong (Book of Songs), quoted by Jeong Do-jeon, an eminent scholar in the Joseon Dynasty: "I've already drunk and have been full with virtue, so I will help you get great fortune in my late year as a man of virtue.” In 1412, King Taejong had the lake expanded in Gyeongbokgung Palace and built Gyeonghoeru Pavilion to hold parties and welcome foreign officials visiting the country. King Sejong succeeded King Taejong and mainly stayed in Gyeongbokgung Palace. He built Jiphyeonjeon Hall to stay with the eminent scholars while building Borugak Hall north of Gyeonghoeru Pavilion to tell the time. On the northwest corner of the palace, Ganuidae, an astronomical observatory, was constructed. In addition, he built Heumgyeonggak Hall where Ongnugiryun (an astronomical water clock) was placed to tell the time and four seasons. However, the whole palace was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along with the Changdeokgung and Changgyeonggung palaces. In 1867, Heungseon Daewongun had the palace expanded and rebuilt, and it was far better than other palaces in size and style. Nonetheless, it was vacated when Queen Myeongseong was assassinated in the palace in 1895 and Emperor Gojong moved to the Russian Legation. When Joseon lost its sovereignty, Japan tore it down to use it as the government quarters of Japan; thus it almost lost what it used to be. Today, the following main buildings still exist: Geunjeongmun Gate, Geunjeongjeon, Sajeongjeon, Cheonchujeon, Sujeongjeon, and Jagyeongjeon Halls, Gyeonghoeru Pavilion, Jaesugak Hall, Hamhwadang Hall, Hyangwonjeong Pavilion, Jibokjae Hall, Hyeopgildang Hall, etc. Gyeongbokgung was built with the basic arrangement of China's ancient capital. On the left of the palace was Jongmyo Shrine where memorial services were performed for deceased kings and queens. At Sajikdan Altar, services for the gods of Earth and Crops were performed. In front were some halls and quarters: Geunjeongjeon where kings held a national ceremony and high-ranking officials assembled to show the highest respect to their king, and; Sajeongjeon where kings attended to their work. In the back are Chimjeon, bed chambers for kings and queens, and there was a garden where they rested. It followed the style of a place for work located in the front and the place for rest located at the back. It seemed to show that strict rules were implemented since it was the main palace in Joseon. It was an important cultural asset that represented the main hall in the Joseon Dynasty since the main buildings like the main hall and pavilion remained and kept their original location even as most of the buildings had been gone.

景福宫是朝鲜时代宫殿的核心,为太祖3年(1394) 迁都汉阳之后所建。宫名是郑道传摘取自《诗经》中的“既醉以酒,既饱以德,君子万年,介尔景福”中祈大福之意的“景福”而得名。1412年太宗扩建了景福宫内的莲花池并在岛上修建了庆会楼,庆会楼被用作国王与大臣举行宴会或迎接海外使臣的场所,用修建莲花池时挖出的土修建了小山峨眉山。现在宫殿内留存下来的主要建筑物有勤政门·勤政殿·思政殿·千秋殿·修政殿·慈庆殿·庆会楼·斋寿阁·淑香堂·咸和堂·香远亭·集玉斋璿源殿等。宫殿遵循了从中国古代延续下来的都城建筑布局的基本形式,宫殿左侧有供奉历代国王与王妃神位的宗庙,右侧有向土地神与谷神祭祀的社稷坛。举行国家大庆或国王接受臣下朝拜的勤政殿、国王处理国政的思政殿等正殿与便殿等都位于前面,后面有国王与王妃的寝殿与休息空间即后苑,呈现前朝后寝格式,这说明景福宫为朝鲜的核心宫殿,建筑布局特别注重了严格的规范。虽然宫殿里的大部分建筑已经消失,但正殿·楼阁等主要建筑依然如昔地固守在原位,通过这些遗迹可以大体上确认朝鲜正宫昔日的面貌。

景福宮は、朝鮮時代の宮廷の中で最も中心となる所で、太祖3年(1394)に漢陽に首都を移した後に建てられた。宮の名称は鄭道伝が『詩経』に「既に酔ひて酒を以てす。既に飽きて徳を以てす。君子万年、その景福を祈る」から大きな福を祈る意味の「景福」の二文字を取って作ったものである。1412年に太宗は景福宮の池を広くし、島の上に慶会楼を建てた。そこで王様と臣下が集まって宴会を行い、外国から来る使臣をもてなすようにし、池を大きくするために掘り出した土で峨嵋山という小山を造成した。現在、宮廷の中に残っている主な建物は、勤政門・勤政殿・思政殿・千秋殿・修政殿・慈慶殿・慶会楼・斎寿閣・淑香堂・咸和堂・香遠亭・集玉斎・僊源亭などがある。景福宮は中国古代から守られて来た都城建物配置の基本形式を守った宮廷で、宮の左側には歴代王たちと王妃の神位を祀った宗廟があり、右側には土地と穀物の神に祭祀を行なう社稷壇がある。建物の配置は、国の大きな行事を行ったり王が臣下たちと朝礼を行う勤政殿と、王が一般的な執務を執る思政殿をはじめとした正殿と便殿などが前面にあり、裏側には王と王妃が暮らす寝殿と休息空間である後苑がある。これは前朝後寝の格式であるが、このような形式はこの宮が朝鮮の中心宮廷であるため、特に厳しく規範を守ろうとしたためであると考えられる。宮の中のほとんどの建物がなくなってはいるものの、正殿・楼閣などの主な建物は残っており、初めて建てられた場所を守っているため、朝鮮時代における正宮の面影を大まかにでも確認できる重要な遺跡である。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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