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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05호

금산 칠백의총 (錦山 七百義塚)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인물사건 / 인물기념 / 순절지
수량/면적 177,284㎡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문화재청 
관리자(관리단체) 문화재청 칠백의총관리소 
문화재 담당부서 : 칠백의총관리소- 상세문의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나,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6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칠백의총 → 금산 칠백의총)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These are the graves and shrines to pay tribute to the 700 military service men, who died a heroic death in the battle of the Japanese army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e loyal soldiers under Jo Heon’s command and the fighting monks under Buddhist Monk Yeonggyu’s command united and recaptured the fortress of Cheongju in 1592. Afterward, he fought a hard battle with the rest of the soldiers against the Japanese army but all died in honor. His disciples Park Jeong-ryang and Jeon Seung-eop made one tomb for them, called “Tomb of Seven Hundred Patriotic Martyrs.” In the 36th year of the reign of King Seonjo (1603), the Monument for Jo Heon and the Soldiers was erected; in the 25th year of the reign of King Injo (1647), Jongyongsa Shrine was built to enshrine the mortuary tablet for the 700 loyal soldiers.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 Japanese tore down the Tomb and destroyed the Monument, but the villagers in Geumsan-gun hid the pieces to keep them. The graveyard was enlarged in 1963, and the memorial hall and the tower for the loyal soldiers were newly built in 1976.

是在壬辰倭乱(1592)时壮烈牺牲的700名兵士的坟墓与祠堂。赵宪(1544∼1592)为义兵长,文科及第后曾任职户曹佐郎、礼曹佐郎、监察及报恩县监,多次被复用,辞职后,发生壬辰倭乱时,义愤之下在沃川组织了1,700多义兵起兵,联合灵圭大师夺回了清州。之后在锦山率700名兵士抵抗倭寇,不幸在战斗中壮烈牺牲,谥号文烈。日帝时代日本人拆除了义冢并炸掉殉义碑,锦山郡民把石碑碎片藏起来保存。1971年用水泥等材料把碎片拼凑复原,2009年再用石材修复,还重新修建了碑阁。1963年国家扩建墓域,1976年新建了纪念馆·殉义塔。

錦山七百義塚は、壬辰倭乱(1592)の時に倭軍と戦い、壮烈に戦死した700人の兵士たちのための墓と祠である。趙憲(1544~1592)は義兵将で、文科に及第した後、戸曹佐郎・礼曹佐郎・観察を経て報恩県監を司ったが、何回も再登用されたにも係わらず官職を辞め、壬辰倭乱が起こると沃川で1,700余人の義兵を起こして霊圭大師と力を合わせて清州を奪還した。引き続き、錦山で倭軍を防ぐために残りの兵士700人とともに錦山戦闘で壮烈に戦ったあげく戦死した。諡号は文烈である。日帝強占期に日本人たちが義塚を壊し、殉義碑を爆破したが、錦山郡の人たちが碑石の破片を隠して保存してきた。1971年には壊れた破片をセメントなどでくっ付けて復元し、2009年には石材で再び復元し、碑閣も新たに建立した。1963年には国によって墓域を拡張し、1976年には記念館・殉義塔を新たに建立した。

임진왜란(1592)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

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들이 전사한 후 조헌 선생의 제자인 박정량과 전승업이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칠백의총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의총을 허물고 순의비를 폭파했으나, 금산군 사람들이 비석 조각을 감추어 보존하였다. 1971년 깨어진 조각을 시멘트 등으로 다시 붙여 복원하였으나, 2009년 석재로 재차 복원하고 비각도 새롭게 건립하였다.1963년 국가에서는 묘역을 확장하고 1976년에 기념관·순의탑을 새로 지었다.



※(칠백의총 → 금산 칠백의총)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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