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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1호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 (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부여군
시 대 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국립부여박물관
문화재 담당부서 : 유형문화재과- 상세문의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This monument was built to commemorate the contribution of Liu Ren-yuan, a commander of Tang China. It was found broken into three pieces lying scattered on Busosan Mountain. Upon its restoration, a small structure was erected over the monument, and it was moved to the Buyeo National Museum after Korea’s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The front parts of the main stone have been chipped or hewn off, and the roof stone is also damaged in places. The inscriptions on both sides of the monument are barely legible due to the defacement. The main and roof stones were each made with a single block of stone. The roof is rounded without any angles. The roof stone features carvings of six dragons (three rising upwards on each side of the roof), all of which appear to be coiling around themselves in a struggle to seize the magic stone depicted at the center of the roof stone. This type of image was inspired by the splendid style of the early Tang period. The inscription consists of two parts: one concerns the family background of Liu Ren-yuan, the other his life and achievements, including his activities after being selected by King Taejong of Tang. He made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King Taejong’s invasion of Goryeo, attacking and destroying the Baekje Dynasty in alliance with Su Ding-fang in 660 and subjugating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carried out by its displaced subjects. However, the description of his activities has been partially erased by the defacement. According to Daedong geumseokseo (On the Monument of the Great East), the inscription was written by Liu Ren-yuan, but this cannot be confirmed. The monument was erected in 663 (the 3rd year of the reign of King Munmu of the Silla Dynasty), three years after the inscription was made on the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Jeongnimsa Temple Site. Even though it is a monument to a commander of the Tang Dynasty, it is of great historical significance for Korea. It records that King Uija of Baekje, the crown prince, and more than 700 of their subjects were taken as hostages to Tang. It also tells the story of the Baekje restoration movement and the ruined capital.

为了纪念唐朝将领刘仁原的功绩而建造的碑。将散布于扶苏山上的三个碎块在原处修复并修建了碑亭, 解放后迁至国立扶余博物馆保管。塔身石的正面略微破损,石首也有局部破损,碑文刻在塔身石正反两面,但因磨损严重,难以辨认。推定碑建造于统一新罗文武王3年(663),即雕刻扶余定林寺址五层石塔(国宝第9号)碑文的三年之后。虽是纪念唐朝将领的功绩碑,但碑文中却记录了义慈王和太子以及约七百名大臣被押送至唐朝的事件、复兴运动的重要内容、化为废墟的都城样貌等,有助于了解当时的情况。

唐の将帥である劉仁願の功績を称えるために建てられた碑である。扶蘇山で三つに割れて散らばっていたが、その場所へ碑閣が建てられて復元され、解放後には国立扶余博物館に移された。碑は本体の前面が少し割れており、定礎も部分的に割れている。碑文は本体の前・後面に刻まれているが、ひどく摩滅しており、見分けるのが困難である。碑が建てられた時期は統一新羅文武王3年(663)で、扶余定林寺址五重石塔(国宝第9号)に碑文が刻まれた三年後である。唐の将帥の功績を称える碑であるが、碑文の中には義慈王と太祖とその臣下700余名が唐へ護送された事実と、復興運動の重要な内容、廃墟となった都城の様子等が記録されており、当時の状況を知るのに役立っている。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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