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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20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탑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번지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보령시 
문화재 담당부서 : 유형문화재과- 상세문의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This is the central pagoda of the group of three pagodas standing side by side behind what is conjectured to be the site of the main Buddhist hall of Seongjusa Temple. Seongjusa Temple was named by King Munseong of the Unified Silla Period when Nanghye, the temple’s head monk, returned from Tang of China and made the temple prosperous. According to Samguk 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Seongjusa Temple was originally named Ohapsa Temple, and was built in the era of King Beop of the Baekje Dynasty. However, it was burnt down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only the site remains. Like the other two pagodas, it has a two-story platform and a three-story body stone. Pole-patterns are engraved on all four sides and on the corners of each story of the platform. A flat stone is inserted between the platform and the one-story main stone. Both the main and roof stones of the body are made of one piece of stone. The supporting stone of the roof is four-stepped. The first story of the main stone appears much larger than the second and third stories. One of the corners has been chipped off. The south face of the pagoda is carved with a door, the middle of which is carved with the image of a lock, while below the lock there is a pair of ring-shaped door fasteners engraved in the shape of an animal. Nail-head-shaped carvings are engraved on the other parts of the door. The roof stone seems wider than the body stone, and the edges of its four corners are lightly raised up. A four-stepped frame is carved on the contacted part of the lower stone supporting the upper stone. Elements of the style, such as the insertion of a stone between the platform and the main stone, or the four-stepped supporting stone of the roof, date back to late Unified Silla. This particular pagoda is rather splendid and light compared with the other pagodas at this temple site but, unfortunately, it is also the most damaged of the group.

据说圣住寺即为«三国史记»里记载的百济法王时创建的乌合寺,统一新罗文圣王时期从唐朝归来的朗慧和尚任此寺主持后寺庙香火鼎盛,于是国王赐予“圣住寺”的称号。壬辰倭乱时期被烧毁,现在只剩下寺址。圣住寺旧址中推测为金堂址的建筑物后面整齐地排列着三座塔,此塔坐落于中间。一层塔身铺有石块、屋顶石的基石分为四层,这些形式属于统一新罗后期的特征,因此断定是此时期的作品。与寺里其他的塔相比,此塔更具华丽和轻快感,然而让人遗憾的是也是已毁损最多的塔。

聖住寺は『三国志記』に登場する百済法王時代に創建された烏合寺で、統一新羅文聖王時代に唐から戻った朗慧和尚が、この寺の住職となり栄えたため、王が「聖住寺」という名を付けたという。しかし壬辰倭乱の時に燃えてしまい、現在は寺址だけが残っている。聖住寺の跡地の金堂跡地と推測できる建物跡の後側に並んで建っている三つの石塔の内、真ん中にある塔である。一重目の塔軸部を支える石の形や、屋根石の台が四段となっている点などが、統一新羅後期の形をしており、この時に造られた作品と思われる。寺址の中にある他の塔と比べ、華やかさと軽やかさを備えているが、傷みが最もひどいため少し残念に思う。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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