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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42호

울진 봉평리 신라비 (蔚珍 鳳坪里 新羅碑)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88.11.04
소 재 지 경상북도 울진군
시 대 신라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울진군
문화재 담당부서 : 유형문화재과- 상세문의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This Silla Stone Monument was accidentally found while farmers were plowing in 1988. Having been buried for a long time, this monument is much effaced. However, the overall form is well retained. The trapezoid-shaped monument is made of a natural rock. It is 204cm tall, 32cm wide at the top and 54.5cm wide at the bottom. The monument is dressed only on the front where about 400 letters are inscribed in the printed style of writing with traces of the square style of writing. The inscription is in idu writing. Idu was a transcription system of Korean words by the use of Chinese characters during the Silla period, which makes it hard to decipher the inscription accurately. According to what is legible, Silla, which was expanding its territory at that time, incorporated the Uljin area into its new territory despite the local residents' objection. The forcible occupation gave rise to a rebellion. Silla convened the Council of Six Districts to address the revolt and dispatched a commander to punish the rebels and erected this monument to prevent any further trouble. This monument seems to have been made in 524,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Beopheung when Silla was actively extending its territory northeastward. This monument is of great importance in that it substantiates the organization of Silla's Council of the Six Districts and King Beopheung's promulgation of the code of administrative law.

三国时代新罗的石碑,1988年凤坪里的村民(权大善)在稻田进行客作业时发现了这个已放置2至3个月的石碑,并将它上报。由于长期被埋在地里,所以状态不是很好,但是仍保存着原貌。新罗在往东北方向进军时所立的石碑,据推测建造于法兴王11年(524)。它是重新研究整个新罗社会历史的各个方面的重要历史资料。而且提供了了解法兴王年间律令颁布和六部制的实施,以及王权实际状况等的线索。

三国時代新羅の碑石で、1988年鳳坪里田客土作業により2-3ヶ月放置されていたのを、村の住民(権デソン)が発見して申告した。長い間地下に埋まっていたため状態が良い方ではないが、本来の形はよく保たれている。新羅が東北方面に進出しながら建立した碑で、法興王11年(524)に建てられたものと推定され、新羅社会全般にわたる様々な面を新たに検討できる重要な歴史的資料である。また、法興王時の律令頒布と六部制の実施、王権の実体などが確認できる手がかりを提供している。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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