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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39호

송시열초상 (宋時烈肖像)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수량/면적 1폭
지정(등록)일 1987.12.26
소 재 지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고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이었다.

이 초상화는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윗쪽에는 정조가 쓴 칭찬의 글인 찬문이 남아있다. 이 두 글에 의해 그의 나이 45세 때 그려진 것이라고도 하고, 깊은 주름과 하얗게 센 수염은 노년의 모습으로 그가 살아있을 때 노년의 모습을 그린 본을 따라 정조 때 옮겨 그려진 것이라고도 한다. 옮겨 그려진 것이라 하더라도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며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성품이 보이며 옷의 흑과 백의 대조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봉안하기 위한 이모본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로 손꼽힌다.

This is the portrait of Song Si-yeol (pen-name: Uam) (1607~1689), the representative Neo-Confucian scholar as well as a politician during the middle period of the Joseon Dynasty. As a disciple of Kim Jangsaeng, Song Si-yeol was a talented and prominent writer whose writing style was logical and vigorous. He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of Chu Hsi and chose to be the successor of Yi I (pen-name: Yulgok; 1536~84) who emphasized the principle of the energizing element called gi, rather than Yi Hwang (pen-name: Toegye, 1501-70) who stressed the importance of the principle called I, which he believed governs human nature and behavior. After going through several government positions, he finally rose to the highest level of vice prime minister. However, after repeated rustication, reappointment, and exile, the saint, being involved in the fight of political faction, was bestowed unfair death-penalty poison from the king. This portrait of Song Si-yeol (56,5cm x 97cm) was drawn showing only upper half on silk fabrics, with the face turning right, dressed in ordinary clothes with broad sleeves that the Confucians used to wear. Wearing the black hood on his head, he maintains dignity with heavy mustache and long silver-gray bushy beard. Saint Song Si-yeol reveals a strong image as a scholar of his profound knowledge, with his emphasized massive figure, strong eye-brows, and deeply lined cheekbones. His face was painted in light color first, then the furrowed lines were drawn in brown, and the wrinkles of the clothes were expressed simply by the curved lines. On the right side, there is a comment with his writing and on the upper part, complimentary remarks made by King Jeongjo. After his death, many a shrine and Confucian Academy have been set up to look back upon the memory of him with respect and affection. Among 5-pieced works that still remain, this portrait is considered as the most valuable one.

这是朝鲜中期儒学家的代表人物尤庵宋时烈(1607-1689)先生的肖像画。宋时烈先生作为朝鲜的具有代表性的性理学者,以刚劲的字体和富有逻辑性的文章而闻名,他平生专门研究朱子学,继承栗谷李珥的学派,成为了畿湖学派的主流。在他死后,尊敬缅怀他的人们建立了好多灵堂与书院,还制作了可供奉其中的肖像摹本,留传至今的有5幅,其中这幅画是首屈一指的。

朝鮮中期の代表的な儒学者であった尤庵宋時烈(1607~1689)先生の肖像画である。宋時烈先生は朝鮮の代表的性理学者で、力強く論理的な文章と書体に優れており、生涯を朱子学の研究に没頭し、栗谷李珥の学通を継いだ畿湖学派の主流であった。彼の死後に彼を奉って追慕する人達によって多くの影堂や書院が建立され、そこに奉安するための模写本が製作されたが、現在五点が伝わっており、その中でこの絵が最高とされている。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초상화이다. 송시열 선생은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로 힘있고 논리적인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고 평생 주자학연구에 몰두하여 율곡 이이의 학통을 잇는 기호학파의 주류이었다.

이 초상화는 가로 56.5㎝, 세로 97㎝로 비단바탕에 채색하여 그린 반신상이다. 머리에는 검은색 건을 쓰고 유학자들이 평상시에 입는 옷인 창의를 걸치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과장되게 표현된 거구의 몸체와 개성적인 눈썹 그리고 깊게 패인 광대뼈의 주름에서는 학식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얼굴은 엷게 채색한 다음 갈색 선으로 주름을 그렸고 옷의 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이 그림 오른쪽에는 그가 45세 때 쓴 글이 있고, 윗쪽에는 정조가 쓴 칭찬의 글인 찬문이 남아있다. 이 두 글에 의해 그의 나이 45세 때 그려진 것이라고도 하고, 깊은 주름과 하얗게 센 수염은 노년의 모습으로 그가 살아있을 때 노년의 모습을 그린 본을 따라 정조 때 옮겨 그려진 것이라고도 한다. 옮겨 그려진 것이라 하더라도 화공의 솜씨가 뛰어나며 명암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현한 강한 눈매와 숱 많은 눈썹, 붉은 입술 등에서 그의 성품이 보이며 옷의 흑과 백의 대조는 유학자로서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그가 죽은 뒤 그를 받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영당과 서원이 건립되었고 그곳에 봉안하기 위한 이모본들이 제작되었는데 현재 5점이 전해지며 그 중에서 이 그림이 제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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