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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1-1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朝鮮王朝實錄 鼎足山史庫本)
해당 문화재의 정보입니다. 분류, 수량/면적, 지정(등록)일, 소재지, 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관리자(관리단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분 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활자본 / 목활자본
수량/면적 1,181책
지정(등록)일 1973.12.31
소 재 지 서울 관악구 관악로 1,103호 동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신림동,서울대학교)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국유
관리자(관리단체)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정족산사고본을 기준으로 볼 때 완질 분량이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와 같은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다.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관을 임명한 다음,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등의 정부 기록, 개인 문집 등을 이용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또, 국왕이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인 사고(史庫)에서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보관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충주· 성주사고의 실록은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재간행하여 춘추관, 강화, 태백산, 묘향산(뒤에 적상산으로 이전), 오대산 등 5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이후 실록은 5부씩 간행되어 각 사고마다 한 부씩 보관되었다.

규장각 소장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조선전기의 전주사고본 실록이 이어진 것이다. 1439년(세종 21) 전주사고의 설치가 결정됨에 따라 1445년(세종 27)에 춘추관과 충주사고본에 소장된 태조~태종실록을 등사함으로써 전주사고본 실록이 처음 제작되었고, 이후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전주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주 유생 안의(安義), 손홍록(孫弘錄) 등이 전주사고본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김으로써 실록이 병화(兵火)를 면하게 되었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1593년에 조선 정부에 인계되었고, 전란 중에 강화도·묘향산 등지에서 보관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추가 간행한 다음, 전주사고본은 강화사고에 소장되었다.

강화사고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653년(효종 4)에도 화재로 일부 서적이 소실되었고, 1665년(현종 6)에 손상된 사고 건물을 보수하였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비롯한 강화사고 소장 서적들을 정족산사고로 이관하였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Joseon Wangjo Sillok comprise 1,893 books and 888 volumes covering 472 years (1392-1863) of the history of the Joseon Dynasty in chronological order, from the reign of King Taejo, the founder, to the end of the reign of King Cheoljong. The contents of these annals are encyclopedic, including general state affairs, economy, culture and politics. They are also highly reliable records with historic authenticity and credibility. Historiographers were legally guaranteed independence in their record keeping and the right to keep secrets. After a king's death and the coronation of his successor, professional officials were appointed to write the annals of his reign at the Sillokcheong, the Office for Annals Compilation. Nobody was allowed to read the sacho, or draft history, not even the king. Once the annals were compiled in multiple copies, each copy was stored in special archives. Up until the early 20th century, most of the copies stored at archives in Taebaeksan Mountain, Jeongjoksan Mountain, Jeoksangsan Mountain and Odaesan Mountain survived, even after the massive destruction by the Japanese Invasion (1592-1598) and the Qing Invasion (1636-1637). The Jeongjoksan Edition consists of 1,181 volumes. Annals covering the period from the reigns of King Taejo to King Taejong were transcribed from the Chunchugwan and Chungjusago editions in the 27th year of King Sejong, and annals of the later period to King Myeongjong were stored in an archive in Jeonju. They managed to survive the Japanese Invasion thanks to An Ui and Son Hong-rok who moved them to Naejangsan Mountain in Jeongeup-gun. Then, they were moved to Haeju in the 26th year of King Seonjo, to Ganghwado in the 29th year of his reign and to Myohyangsan Mountain in the 32nd year. After the Japanese Invasion (1592-1598), from July in the 36th year of King Seonjo to March in the 39th year, four additional copies were produced, which then were preserved at Manisan Mountain, Ganghwado. Later, newly compiled annals were added. Later, further severe damage was caused by the Qing Invasion (1636-1637), followed by a fire in the fourth year of King Hyojong (1653) which resulted in the loss of some volumes: it was then restored in the sixth year of King Hyeonjong (1665). In the fourth year of King Sukjong, a new archive was erected at Jeongjoksan Mountain in Ganghwado Island, which became a new home to the annals that had been kept at the Manisan Mountain archive. Then they were moved to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predecessor of the present Seoul National University) under the Japanese Imperial Regime; after the Liberation, they were housed at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朝鲜王朝实录》用编年体(按照时间顺序记载历史上所发生事件的一种历史叙述方式)记录了从朝鲜太祖到朝鲜哲宗25代472年间(1392-1863)的历史。它共有1893卷888册,是一部庞大的历史书。它记载了朝鲜时代的社会、经济、文化与政治等多个方面的情况,历史真实性和可靠性非常高。而且,在史料的编纂上,史官这个官职的独立性和对于记述的保密性也得到了保障。编纂实录的工作是由下一任王即位后,建立实录厅,安排有关史官后进行编纂的,连皇帝也不能将其任意翻看,必须保障它的秘密性。史料成书以后,在特别设置的史库(保管实录的仓库)里各保管一份,在经历壬辰倭乱和丙子胡乱时被丢失,但20世纪初太白山、鼎足山、赤裳山、五台山的史库里的实录保存并留传了下来。鼎足山本由1181册组成,从太祖到太宗的实录是在世宗27年(1445)誊写了以前的春秋馆本•忠州史库本,之后到明宗的实录由全州史库保管,壬辰倭乱期间,全州的儒生安义和孙弘禄两人将它搬运到井邑郡内藏山,从而免遭战火。宣祖26年(1593)被迁移到海州,宣祖29年(1596)又被迁移到江华岛,宣祖32年(1599)被迁移到了妙香山。壬辰倭乱结束后,从宣祖36年(1603)7月到宣祖39年(1606)3月之间以此为基础重新编制了4部实录,然后奉安在江华岛的摩尼山,以后实录按照编纂的内容不断添加。但是丙子胡乱期间曾受到很大损坏。之后孝宗4年(1653)因为火灾烧毁了一部分,显宗6年(1665)将其修补。肃宗4年(1678)在江华岛的鼎足山重新修建史库,摩尼山史库本被搬运到了这里。以后按照编纂的内容一直不断添加。1910年日本将它移交到京城帝国大学,光复后由首尔大学奎章阁一直保存至今。

『朝鮮王朝実録』は朝鮮太祖から朝鮮哲宗の時までの25代472年間(1392~1863)の歴史を編年体(歴史的事実を起きた順に記述する歴史敍述方式の一つ)で記録した本である。総1893巻888冊にもなる膨大な歴史書である。これは朝鮮時代の社会、経済、文化、政治など多方面にわたって記録されており、歴史的真実性と信憑性が非常に高い。また史料の編纂において、史官という官職の独立性と記述に対する秘密も保障された。実録を編纂する作業は次の王が即位した後、実録庁を開いて関係する官吏を配置して発行し、史草(史記の草稿、実録の原稿)は王でもむやみに開ける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秘密を保障した。史料が完成された後には、特別に設置した史庫(実録を保管した倉庫)に各1部ずつ保管した。壬辰倭乱と丙子胡乱で消失されたが、20世紀初まで太白山、鼎足山、赤裳山、五台山の史庫に残って伝えられて来た。この鼎足山本は1181冊で、太祖から太宗までの実録は世宗27年(1445)にそれ以前の春秋館本・忠州史庫本を謄写して、その後明宗までの実録は全州史庫に保管されてきたが、壬辰倭乱の時全州の儒生であった孫弘禄によって井邑郡内蔵山に運ばれて、戦火を兔れた。宣祖26年(1593)に海州に移した後、再び宣祖29年(1596)に江華島、宣祖32年(1599)には妙香山に移した。壬辰倭乱が終わった後、宣祖36年(1603)7月から宣祖39年(1606)3月の間にこれを土台として4部の実録を再び制作して江華島摩尼山に奉安し、以後実録が編纂されるたびに付け加えた。しかし、丙子胡乱を契機に多くの被害を被った。その後、孝宗4年(1653)には火災で若干の本を失い、顕宗6年(1665)にそれを補修した。粛宗4年(1678)には江華島鼎足山に新たに史庫を設け、摩尼山史庫本をそこに移した。以後、ずっと編纂されるたびに追加されてきた。そして、1910年日本が京城帝国大学に移管し、光復後はソウル大学奎章閣にそのまま所蔵されて現在に至っている。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에서부터 조선 철종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編年體: 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정족산사고본을 기준으로 볼 때 완질 분량이 1,187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으며, 역사적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와 같은 가치를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아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실록 편찬은 국왕이 서거하고 다음 왕이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다. 실록 편찬을 담당하는 임시 기관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관을 임명한 다음, 사관(史官)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등의 정부 기록, 개인 문집 등을 이용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또, 국왕이라도 함부로 실록이나 사초를 볼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관들이 공정하게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완성된 실록은 국가의 중요 서적을 보관하는 서고인 사고(史庫)에서 보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서울에 있던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사고에 보관했는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충주· 성주사고의 실록은 소실되었고 전주사고본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전쟁이 끝난 후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4부를 재간행하여 춘추관, 강화, 태백산, 묘향산(뒤에 적상산으로 이전), 오대산 등 5곳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이후 실록은 5부씩 간행되어 각 사고마다 한 부씩 보관되었다.

규장각 소장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조선전기의 전주사고본 실록이 이어진 것이다. 1439년(세종 21) 전주사고의 설치가 결정됨에 따라 1445년(세종 27)에 춘추관과 충주사고본에 소장된 태조~태종실록을 등사함으로써 전주사고본 실록이 처음 제작되었고, 이후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전주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주 유생 안의(安義), 손홍록(孫弘錄) 등이 전주사고본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김으로써 실록이 병화(兵火)를 면하게 되었다. 전주사고본 실록은 1593년에 조선 정부에 인계되었고, 전란 중에 강화도·묘향산 등지에서 보관되었다. 전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4부를 추가 간행한 다음, 전주사고본은 강화사고에 소장되었다.

강화사고는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1653년(효종 4)에도 화재로 일부 서적이 소실되었고, 1665년(현종 6)에 손상된 사고 건물을 보수하였다. 이후 1678년(숙종 4)에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짓고 실록을 비롯한 강화사고 소장 서적들을 정족산사고로 이관하였다.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서울로 이관, 규장각도서로 편입되어 조선총독부의 관리를 받다가, 1928~1930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정족산사고본 실록을 관리했으며, 199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독립 기관으로 분리되면서 규장각이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소장, 관리 책임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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